역사 칼럼

[편집국에서]‘상주본’도 소장자도 양지에서 맘 편히 살았으면…

“적은 돈도 몰래 숨겨놓으면 신경 쓰이는데 상주본을 보관하느라 상상도 못할 스트레스를 겪고 있습니다.” “화재로 책이 훼손돼 좌절하기도 했어요.” “소중한 유산을 공개한 뒤 양지로 나와 맘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장하고 계신 배 선생님!

 

얼마나 힘드십니까. 오죽하면 지난 1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훈민정음 상주본 이대론 안된다’란 주제의 토론회에 나와 이렇게 토로했을까 싶습니다. ‘훈민정음 상주본’은 어찌 보면 참 가벼운 책입니다. 한지 30여장을 엮어 겨우 60여쪽에 불과하니. 그런데도 선생님의 어깨를 머리를 온몸을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밤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정도로 무겁지 않습니까. 조금은 이해할 듯도 합니다. 불길에 넣으면 한순간에 사라질 그 가벼운 종이책의 묵직함을.

 

아마도 그 무게는 상주본이 가진 가늠하기조차 힘든 큰 가치에서 나오겠죠.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고미술계에서는 이런 국보급 문화재를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부르는 것을.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물인 거죠. 실제로 선생님이 상주본을 공개하기 전까지 유일본이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이 그렇잖습니까. 국보 70호로 지정돼 한번씩 전시될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죠. 이미 20년 전에 인류 차원에서 보존할 만한 가치를 인정받아 ‘The main text of Hunminjeongum’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도 됐고요.

 

여러 민족, 나라들이 문자를 만들었지만 훈민정음 해례본같이 문자의 창제 목적과 동기, 그 원리까지 해설한 책은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앞날을 내다본 듯 정인지·최항·박팽년 등 8명의 당대 석학에게 훈민정음을 설명하는 이 해례본을 편찬토록 했습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이란 책의 첫 구절은 참으로 유명하죠.

 

사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40년 안동의 진성이씨 가문에서 간송본을 구해 공개할 때까지 한글의 창제 원리를 놓고 온갖 주장들이 난무했죠. 고대 글자를 모방했다, 몽골문자를 참조했다, 불교의 범자에서 유래했다, 심지어는 화장실 창살 모양에 그 기원이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이 해례본이 양지로 나오면서 비로소 한글의 창제 원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죠. 하물며 상주본은 간송본에는 없는 주석들도 있으니….

 

선생님이 상주본 소장으로 겪는 고통을 밝힌 게 한두 번이 아님을 잘 압니다. 특히 지난달 국정감사장에선 “1000억원을 받아도 (국가에) 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밝혀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뜻은 일반적으로 감정가의 일부를 사례금·보상금의 이름으로 지급하는 게 관례이고, 상주본의 높은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액수를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국민감정은 달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선생님은 그동안 명예회복과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셨습니다. 명예회복은 상주본을 훔치지 않았는데도 감옥살이를 한 것에 대한 억울함을 푸는 명예회복으로 이해합니다. 금전적 보상도 관례처럼 요구할 수 있는데,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듯하니 답답하시겠죠.

 

문화재청도 많이 답답해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운신의 폭이 아주 좁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선생님으로선 억울하다 하시겠지만) 상주본의 소유권이 법적으론 문화재청에 있어서죠. 문화재청이 돈을 지불한다면 자신의 것에 돈을 주는 꼴이 됩니다. 아주 고약한 상황에 몰린 거죠. 그나마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최근 “상주본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시면 최초의 문화재 발견자로서 명예회복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명예회복의 길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겁니다. 보상도 서로 머리를 맞댄다면 문화재 최초 발견자에게 어울리게끔 지급될 수 있는 방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상주본의 개인적 매매도 쉽지 않잖습니까. 아시죠, 고미술계의 말처럼 ‘바람을 너무 많이 쐰 물건’이라 컬렉터가 쉽게 나설 수 없을 겁니다.

 

선생님! 상주본을 공개한 지 무려 10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주본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언제쯤 볼 수 있을지 많이 궁금합니다. 이젠 ‘큰마음’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려놓으니 비로소 얻는다는 불가의 말도 있잖습니까. 상주본의 가치를 알아본 최초의 ‘눈 밝은’ 사람, 발견자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 말씀처럼 이젠 정말 “맘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재기 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