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현실

지금, 북한은 무엇을 원할까?

1967년 1년간 DMZ에서 남북 간의 충돌 횟수는 400회가 넘었다. 그해 겨울 주한 유엔군사령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1968년 북한이 남한에 유격대를 보낼 가능성이 있으며,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월 중순 박정희 대통령은 원주에서 안보회의를 개최했다. 북한의 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주일 후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했고, 다음날 미국의 정보함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었다. 동년 11월에는 북한의 유격대가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했다. 1969년에도 북한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미국의 정찰기 EC-121기가 북한에 의해 격추되었고, 한국의 민항기가 납치되어 평양을 향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가 또 다른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주한 유엔군사령관은 박정희 정부에 적극적 대응을 자제하도록 요청했다. 또한 만약 한반도의 안보상황이 불안해진다면 더 많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더 많은 한국군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유지비는 미군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미국 내에서의 반전운동으로 미군을 더 파병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군 사령관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병력 증파를 요청했고, 가능한 방안은 한국군의 증파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구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만약 한국군이 당하고만 있다면 한국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북한의 공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결과 1967년부터 1969년 사이 한반도의 안보위기는 정점에 달했고, 미국의 한국군 베트남 증파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 해군함 푸에블로호가 1968년 1월13일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승무원 1명이 사망했으며 피랍된 82명은 11개월 뒤인 11월23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푸에블로호 선체는 돌려주지 않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 공세와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대는 한·미관계의 균열에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968년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969년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이후 한·미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1970년대 후반 코리아게이트와 한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로 미국과의 갈등은 그 정점을 찍었다.

북한은 당시 왜 공세를 취했을까? 북한이 원했던 것은 한국군의 증파를 막음으로써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우회적으로 돕고자 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주한미군이 철수하거나 규모가 감축되면 금상첨화였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1969년 이후 1980년까지의 상황은 북한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지금 북한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박근혜 정부 들어와 한·중관계가 좋아질 때 북한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중국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이 방한 연설에서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와의 협력은 언급하면서 공산주의자들 간의 연대는 얘기하지 않았을 때 북한 지도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북한은 무엇보다도 우선 한·중관계에 다시 금이 가는 것을 원할 것이다. 이는 냉전 시대 북·중·러 3각동맹이 부활함을 의미한다.

둘째로 북한 정권은 안보위기의 고조를 원할 것이다. 안보위기는 독재정권이 내부 안정을 위해 항상 원하는 것이다. 남한이 민주화되고, 햇볕정책을 실시했을 때 북한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대결을 통한 위기가 없어진다면, 북한이 주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지금 남북 협력 최후의 보루였던 개성공단이 폐쇄되었다. 북한군이 뒤로 물러서야 했기 때문에 개성공단과 남북 철도 연결을 반대했던 북한의 강경파 군부는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을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일어나는 일이 있다. 지금 아측의 목표는 무엇인지, 상대방의 목표는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아시아에서 데탕트를 추구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약화시켰던 닉슨 독트린이 결과적으로 정치지도자들에게 자율성을 주었고, 이러한 상황이 결국 한국과 필리핀에서 독재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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