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환관들을 위한 변명

“천하의 권세를 쥔 자는 첫째가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그의 내연녀인) 객(客)씨이며, 셋째가 황제(희종)이다.”

1624년(인조 2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은 <조천항해록>에서 명나라의 여론을 전하고 있다. 환관 위충현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던 희종의 유모(객씨)와 손잡고 국정을 쥐락펴락한다는 것이다. 황제의 권력서열은 3위 정도라는 것이다.


명나라 백성들은 위충현이 지나가면 황제(‘만세’)에 비견되는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단다. 심지어 위충현을 ‘감히’ 공자와 견주고, 살아있는 그를 위해 ‘사당’까지 조성했단다.

환관 유근(1451~1510)도 만만치 않았다. 황제(무종)를 환락에 빠뜨리면서 국정을 농단했다. 심지어 대신들을 뙤약볕에 하루 종일 세워놓는 ‘단체기합’까지 줬다니…. 하지만 군주의 총애가 사라지자 권력은 아침이슬처럼 덧없었다. 위충현은 천 갈래 만 갈래 몸을 찢기는 이른바 천참만륙(天斬萬戮)의 극형을 받았다. 유근은 무려 3357번의 칼질형(능지처참형)을 당했다. 명나라는 가히 ‘환관의 나라’였다.

환관(사진은 청대 환관)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있었고, 환관들의 비밀경찰조직인 동·서·내창(廠)까지 신료들을 감시·체포·고문·숙청했다. 심지어 환관들로 구성된 비선 조직의 장(병필태감)이 황제의 결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쯤 해서 당나라 시대 최초의 환관 재상이 된 이보국의 한마디가 오버랩된다. “주인님(황제)은 가만히 계세요. 바깥 일은 늙은이(이보국)가 다 할게요.”

궁형제도가 없었고, 환관이 되려고 거세하는 법도 없었던 조선의 환관들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외려 1504년 연산군의 면전에서 “사람 좀 그만 죽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다가 도륙당한 환관 김처선의 충(忠)이 심금을 울린다. 중종반정 직후 김처선을 선양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김처선이 술에 취해 임금에게 망령된 말을 했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환관 주제에 임금에게 대들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단다. ‘참 나쁜 사람들’이다. 그나저나 후한 말기 대장군 하진이 “환관들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하자 조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단다. “환관은 고금부터 있었다. 다만 군주의 총애를 빌려 국정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이다.”

조조는 망국의 책임은 환관이 아니라 군주가 져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기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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