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인간백정의 역사

“시골에서 집행하면 누가 알겠는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하고 사지를 각도로 조리돌려라.”

1407년(태종 7년) 태종은 충청도 연산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여자에게 극형 중의 극형을 내렸다.

1728년(영조 4년),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에서는 소름 끼치는 의식이 벌어졌다.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의 수급(참수된 목)을 받는 승리의 의례였다.


숭례문 앞은 끔찍한 광경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조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목을 베 그 시신들을 저잣거리에 내다버리는 기시(棄市)의 법으로 처벌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예외없었다. 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고을 수령까지 상해를 입힌 자에게 ‘기시’의 형을 내렸다.(1438년)

형조가 ‘범인의 정신병 전력’을 들어 “기시형은 좀 과하다”는 의견을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강상죄가 무겁다는 것이었다. 1456년(세조 2년) 단종복위운동을 벌인 성삼문과 이개 등은 군기감(태평로) 앞에서 거열형을 당한 뒤 사흘간이나 효수됐다.

그랬다. 반역모반죄인이나 삼강오륜을 거스르는 강상죄인은 원칙적으로 능지처참이나 참형(사진)으로 다스렸다. 떨어진 목과 찢긴 몸통을 거리에 전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국에 돌려보였다니…. 조선만의 살풍경은 아니었다. 중국 한나라 때의 사형장은 장안성 안, 그것도 제후국(속국)의 사절이 머무는 만이저(蠻夷邸) 인근에 있는 고가(藁街)라는 곳이었다. 역시 만천하에 한나라의 위엄을 보이겠다는 으름장이었다. 하기야 상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은 신하들을 죽여 포를 뜨고 젓을 담가 제후국에 보내 맛까지 보게 했단다.

“사형수(천주교인)의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클로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범인의 목은 야전 냄비걸이처럼 생긴 꼬챙이에 걸려 전시된다.”(비숍의 <한국과 이웃나라>)

서양도 예외는 아니다. 예컨대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로베르 다미앵(1715~1757) 역시 거열형이란 극형을 받았으니까.

인간백정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새삼 “삼가야 한다. 삼가야 한다. 형벌을 행할 때는 가엾게 여겨야 한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사기> ‘오제본기’)는 순임금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기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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