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영조가 형을 죽였다”

“김일경은 임금 앞에서도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국문장에 끌려나온 김일경과 목호룡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왕세제(영조·사진) 시절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이다. 김일경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극력반대했던 소론의 핵심이었다. 목호룡은 경종독살시도사건(1722년)을 폭로하면서 역적의 수괴로 왕세제를 지목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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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른 영조와 노론 측이 이들을 국문장으로 끌어낸 것이다. 두 사람은 당당했다. 김일경은 “나(吾)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自視靑天白日)”면서 “선대왕(경종)의 빈전 앞에서 달갑게 죽겠으니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했다. 목호룡은 “죄가 있다면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다는 죄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1725년 1월에는 이천해라는 군사(軍士)가 어가 행차를 막고 온갖 흉언을 퍼부었다. 한낱 군졸에 불과한 사람이 임금을 향해 “국가가 이토록 무도할 수 있느냐”고 막말을 던진 것이다. 이천해는 24번의 무자비한 압슬형(壓膝刑)에도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4년 뒤인 1728년에는 전국적으로 20만명이나 가담한 민란(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이인좌는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시면서 조석으로 곡을 했단다.

당대 백성들이 수군댔다. ‘영조 당신이 이복형(경종)을 죽이고 보위를 찬탈했어!’ 왕세제 측근 및 노론 측과 내밀한 교분을 쌓았던 목호룡의 폭로는 그만큼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왕세제의 측근들이 경종을 칼로, 혹은 독약으로, 혹은 거짓교서로 죽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목호룡과 대질심문한 연루자들은 쩔쩔맸다. 김씨 성의 궁녀를 시켜 경종을 실제로 독살하려 했던 증거까지 나왔다. 1720년 12월 경종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반 대야 분량의 담수를 토한 게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경종은 어쩐 일인지 이복동생을 더 추궁하지 않았다.

차일피일하다 파국이 왔다. 1724년 8월 경종이 급서한 것이다. 치료과정에서 왕세제는 음식의 상극(相剋)이라는 ‘게장과 생감’을 경종에게 올렸다. 또 어의(御醫) 이공윤의 반대에도 고집을 피워 ‘인삼과 부자(附子)’를 처방했다. 의사가 아니고서는 절대 내려서는 안될 극약처방이었다. 오죽했으면 훗날(1755년) 나주 벽서 사건으로 붙잡힌 신치운이 “갑진년(1724년) 이후 게장을 먹지 않는다”며 비아냥댔을까.


이기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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