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삼전도비의 굴욕사

“여러분이 좀 나서 주셔야겠소.”

1637년(인조 15년) 11월, 인조가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청나라가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에 ‘청태종 승첩비’를 세우라”는 칙서를 보내 조선을 핍박한 것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몇몇 신하들을 불러 “비문 좀 쓰라”고 청했다. 그러나 누가 손들고 나서겠는가. 누구는 칭병(稱病)으로, 또 누구는 일부러 거친 글로 피해 나갔다.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 등 두 사람의 글을 택해 청나라로 보냈다. 청나라는 ‘황제의 공덕을 더 서술하는’ 조건으로 이경석의 글을 낙점했다. 임금은 “나라의 존망이 경에게 달려 있으니 좀 고쳐 쓰라”고 이경석을 다독거렸다. 이로써 삼전도비문(사진)이 완성됐다.

“(조선이) 미욱하여 재앙을 불렀는데~우리 임금이 복종하여~황제의 은혜 덕분에 국토가 예전처럼 보전됐다. 만년토록 황제의 덕이 조선에 빛날 것이다.”(비문)


또 한번의 굴욕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1668년(현종 9년) 사건이 터진다. 송시열이 현종으로부터 궤장(궤仗·몸받침대와 지팡이)을 하사받은 이경석에게 “공(이경석)은 ‘수이강(壽而康·오래 살고 편안히 지냄)’했다”는 축하글을 남겼다.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수이강’, 이 세 단어는 무시무시한 가시를 품고 있었다.

금나라에 멸망당한 뒤 ‘과도한 내용의’ 항복문서를 지어 바친 북송의 손적이 ‘오래 편히 살았다(수이강·壽而康)’는 비아냥을 들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경석이 바로 ‘조선판 손적’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송시열은 더 나아가 “~개도 이경석의 똥은 먹지 않을 것”이라고 사납게 몰아붙였다. 반면 이경석은 소극적인 대응으로 예봉을 피했다.

그때 꺼진 줄 알았던 사건은 이경석 사후에 다시 타오른다(1701년). 소론의 박세당이 고(故) 이경석의 신도문을 쓰면서 “이경석은 봉황(군자)이며, 송시열은 봉황을 꾸짖는 올빼미(소인배)”라고 맹비난한 것이다. 그러자 노론 측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춘추대의에 따라 오랑캐에 아첨한 이경석을 탄핵한 것일 뿐”이라고 앙앙불락했다. 또 한번 조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돌이켜보면 이경석의 처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뒤에까지, 아니 이 순간까지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삼전도비문을 억지로 ‘지어야 했던’ 이경석이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이기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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