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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확정

윤민용 기자
ㆍ또 다른 갈등의 선이 되다

1947년 8월17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선인 래드클리프 국경선이 확정됐다. 8월14일 파키스탄이, 다음날인 15일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영국 연방의 주권국가가 된 이후에야 국경선이 확정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연방제를 골격으로 하는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했다. 인도 독립에 대한 아이디어는 여러 가지였다. 인도 총독을 지낸 웨이블 경은 통일된 상태로 인도에 권력을 넘겨주고, 필요하다면 인도인들 스스로 인도를 분할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수의 영국인들은 권력이양을 서두르면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가 뒤섞인 인도 대륙의 분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47년 당시 총독을 맡아 인도 독립의 전권을 위임받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권력이양을 서둘렀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인도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은 각기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마운트배튼 총독은 1947년 6월3일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내용의 독립안을 발표했다.

인도의 분리는 인도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통일된 인도를 원했던 간디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의회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선을 확정하기 위해 1947년 7월 시릴 래드클리프 경을 국경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주일.

그는 인도 국민회의를 이끄는 네루, 무슬림연맹의 진나 의장을 만났지만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또 국경선위원회에 속한 힌두교 위원과 이슬람교 위원들은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래드클리프 경이 단독으로 국경선을 결정해야 했다.

국경선을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로와 철도의 분할, 통신 및 관개, 전력 등 인프라의 분할과 같은 거시적 차원의 분할과, 사유재산의 분할처럼 미시적인 차원의 분할을 포괄했다. 국경선 확정으로 인해 어떤 집은 반토막이 나서 안방은 파키스탄에, 다른 방은 인도에 속하게 됐다. 1400만여명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이주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벵골과 펀자브 지역의 분리였다. 무슬림이 다수인 서파키스탄과 달리 이 두 지역은 무슬림과 힌두교도의 비중이 비슷했던 것이다. 결국 펀자브 지역의 서쪽은 서파키스탄이 됐고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주가 됐다. 인도대륙 동북쪽의 벵골도 마찬가지여서 동벵골은 파키스탄에, 서벵골은 인도에 속하게 됐다. 그러나 일방적인 국경선 분할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여기에는 소수 종파와 집단에 대한 배려가 없었고, 불가촉천민(힌두교 카스트 제도의 그 모든 계급보다 아래에 속하는 하층민들을 뜻하는 말)은 무시되었다.

국경에선 끊임없이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유혈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20만~60만명. 여성들은 유혈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수천만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 인도에 무지했던 래드클리프 경의 국경선 분할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끝내는 카슈미르 지역 충돌로 이어져 양국은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오늘날도 양국 간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