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어제의 오늘

1991년 소련 공산당 ‘8월 쿠데타’

이윤주 기자 
ㆍ소련의 종말을 앞당기다


1991년 8월19일 오전 6시, 소련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왔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자칭한 혁명세력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발표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정규방송 대신 발레곡 ‘백조의 호수’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공산당 강경 보수파가 주도한 ‘8월 쿠데타’의 신호였다. 모스크바 시내에 공수부대와 전차 사단 등이 배치됐고 19일 오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다.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반발한 공산당 강경 보수파의 8월 쿠데타가 발생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루치코프, 부통령 야나예프 등 8인이 중심이 된 쿠데타 세력은 거사 하루 전인 18일 크림반도의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야나예프 부통령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쿠데타 세력은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던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보수파의 세력을 회복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정치·경제적 구조조정과 개방에 초점이 맞춰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기존 공산당 체제의 보수파들에게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각 공화국에 대폭 이양해 보다 느슨한 형태의 연방을 지향하는 신 연방조약 체결을 막는 것도 쿠데타 세력의 목표였다. 

그러나 이들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성급하게 시작한 거사는 곧바로 개혁을 원하는 국민의 저항에 맞닥뜨렸다. 시민들은 모스크바 시내 ‘백악관’으로 모여들었고 개혁 의지는 뜨거웠다. 쿠데타 3일째인 21일 새벽, 군 장갑차가 시위대의 바리케이드를 밀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시민이 희생되면서 시위대의 저항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시위 진압에 나선 특수부대도 속속 이탈했다.결국 21일 국방장관 명의로 모스크바에 진주한 모든 병력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지도부와의 재협상을 거부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쿠데타 지도부는 모두 체포됐고,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는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3일 천하의 ‘8월 쿠데타’는 역설적으로 소련의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소련 공산당은 급속히 세력이 약화됐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한층 가속화됐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사진 왼쪽)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해 12월8일 소련에 속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요 3국 지도자가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협정에 서명하면서 1917년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출범했던 소련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