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어제의 오늘

1966년 톈안먼 광장 홍위병 집회

김준기 기자

ㆍ광란의 문화혁명 서막 올라

1966년 8월18일.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은 전국에서 올라온 수백만명의 홍위병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붉은색 표지의 <마오(毛)주석어록>을 흔들었다. 단상에 오른 마오쩌둥(毛澤東)은 “모든 반란은 타당하다”고 외쳤고, 홍위병들은 환호했다. 중국 대륙을 광란으로 몰아간 문화혁명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문화혁명은 그해 5월16일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됐다. 그는 공산당을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5월25일 마오쩌둥의 뜻을 받든 베이징 대학의 젊은 철학과 강사 네위안쯔는 대학당국과 교수들을 우파 또는 반당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 붙였다. 29일에는 베이징 칭화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홍위병이 결성됐다.

홍위병 대표단은 7월27일 마오쩌둥에게 서한을 보내 공산주의를 위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고, 대량 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전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했다. 중국 전역에 홍위병들이 구성됐고, 이들은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당시 베이징에 모인 홍위병은 11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홍위병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마오쩌둥을 반대하는 당 지도자, 교사, 지식인들을 공격했다. 1969년까지 이어진 문화혁명의 혼란기에 360만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75만~15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막고,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서 그가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시도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1957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자급자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집단농장과 인민공사를 만드는 등 농업·산업 생산을 늘리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연이은 기근과 생산성 악화 등으로 3년간 2000만명이 사망하는 등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직을 사임했다. 공산당의 권력은 새 국가주석인 류샤오치와 총리 저우언라이, 당총서기 덩샤오핑 등에게로 넘어가는 듯했다. 마오쩌둥은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1963년부터 공산주의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강력한 지도자로 각인됐고, 이들은 몇 년 후 홍위병으로 자랐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홍위병들은 세력을 확장하려다 자기들끼리 다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오쩌둥은 1968년 홍위병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고, 중국 정부는 정규군을 투입해 질서를 회복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사후인 1981년 6월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문화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