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40) 여성의 이름

손동우 기자 sdw@kyunghyang.com


‘영자’와 ‘경아’의 차이는 무엇일까.

1970년대 중반 개봉된 <영자의 전성시대>와 <별들의 고향>은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원조 격으로서 각각 조선작과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인 영자는 식모, 봉제공장 공원, 시내버스 안내양을 거쳐 ‘마지막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창녀가 된다.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는 부유한 중년남자의 후처 등을 거쳐 호스티스로 전락한 뒤 길거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1970년대 영화 <별들의 고향> 속 여주인공 이름 ‘경아’는 세련된 감성을 반영해
당시 유흥업소 여종업원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영자와 경아는 비슷한 인생경로를 밟았지만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바로 영자와 경아라는 이름이다.

영자는 일제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자(子)’로 끝나는 구시대적 이름을 가졌지만 경아는 ‘아(娥)’라는 현대적 분위기를 풍기는 이름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실제로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는 ‘순(順)’ ‘숙(淑)’ ‘희(姬)’ 등과 함께 여자이름의 대종을 이루었다.
그 당시 각급 학교의 졸업 앨범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영자, 순자, 수자, 명자, 춘자, 문자, 윤자, 경자 등과 이들 ‘자’자 돌림 대신에 ‘순·숙·희’를 대입하면 이 땅의 거의 모든 여성들을 포괄할 수 있었다.

반면 경아는 -<별들의 고향>에서도 그는 영자보다는 훨씬 도회적 면모를 갖고 있지만- 본격적인 산업화와 함께 전통의 굴레에서 탈피하려는 여성들의 몸짓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영화의 후폭풍도 대조적이었다. 유흥업소에서 촌스러운 ‘영자’를 추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경아’란 이름을 가진 여종업원들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왕조시대 이 땅의 여성들은 이름을 갖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했다.
그때 ‘眞書(진서)’로 불리었던 한자식의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계층은 사대부 남성에 국한됐는데 이들은 본명 외에도 자(字)와 호(號)라는 제2, 제3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천재시인 허난설헌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는 본명(초희·楚姬)과 자(경번·景樊), 호(난설헌·蘭雪軒)를 모두 가진 조선조 유일의 여성이었다. 왕조시대 여성들은 설령 사대부 계층이었다 하더라도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특정 가문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이름을 갖게 된 이후에도 죽어서는 다시 무명 아닌 무명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있는 부부합장묘를 보면 여성 무덤 앞에는 ‘배경주김씨지묘(配慶州金氏之墓)’와 같은 묘비명이 세워져 있다.
즉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아무개의 배우자로서, 친정의 본관이 경주 김씨’라는 사실 밖에는 없는 것이다.

왕조시대와 식민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여성들은 ‘폼나는’ 이름을 갖지 못했다.
67년 발표된 방영웅의 장편소설 <분례기(糞禮記)>는 ‘똥례’-분례는 이것의 한자식 표기-라는 농촌 출신 여성의 기구한 삶을 다룬 작품인데, 이는 어머니가 변소에 갔다가 인분 위에서 낳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여자아이 이름은 ‘아무렇게나’ 짓던 당시 농촌의 현실을 반영한 셈이다.

강고한 남아선호 사상이 여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했다. 계속해서 딸이 태어날 경우 붙여진 ‘필남(必男-반드시 아들을 낳자)’ ‘후남(後男-다음에는 아들을 낳자)’ ‘필녀·필순(畢女·畢順-딸은 이제 끝내자)’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순·숙·희’와 ‘아무렇게나형’, ‘남아출생 기원형’ 이름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에 출생한 여아들의 경우 아람, 보람, 꽃님, 누리 등 한글 이름이 크게 유행했다. 2000년대 이후 한글 이름은 인기를 잃었고, ‘ㄴ’으로 끝나거나 다소 중성적으로 보이는 이름들이 대세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법원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08년 출생한 여아 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은 ‘서연’이었고 민서-지민-서현-서윤-예은-하은-지우-수빈-윤서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최근에는 ‘글로벌 시대’에 맞게 수지, 리나, 세라, 세리, 세나, 유진 등 영어 표기와 발음이 쉬운 이름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경향신문 역사시리즈 > 100년을 엿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 TV 인기 드라마  (0) 2010.08.15
(41) 아르바이트  (0) 2010.08.08
(39) 지하철  (0) 2010.07.25
(38) 여름방학숙제  (0) 2010.07.18
(37) 봉숭아꽃 물들이기  (0) 2010.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