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37) 봉숭아꽃 물들이기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동네 화장품가게에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학생들이 매니큐어를 고르고 있다. 방학을 맞은 해방감에 빨강, 초록빛깔의 매니큐어로 대담한 도전을 시도하려나보다.

각종 시험과 과외로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으랴. 이해가 되면서도 고운 소녀들의 손톱엔 화학제품보다 봉숭아꽃물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귀밑 1㎝ 머리를 강조하던 엄격한 선생님들도 여름방학이 끝난 후 복장검사에서 봉숭아물 들인 손톱만은 관대하게 봐주시곤 했다.


 


자연학습을 나온 어린이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단독주택이 대부분이던 시절엔 서울에도 마당에 봉숭아를 심는 집들이 많았다.
해마다 7~8월이면 줄기와 잎자루의 겨드랑이에서 봉숭아 꽃잎이 두세 개씩 피어난다. 씨 주머니가 익으면 살풋 손끝이 닿기만 해도 터져 버리는 봉숭아는 그래서 꽃말도 ‘날 건드리지 마세요’다.
“울밑에선 봉선화야~”란 노래 덕분에 우리에겐 봉선화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기도 하다. 꽃 모양새가 봉황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봉숭아 꽃송이를 자세히 보면 그 모양새가 마치 날개와 깃, 발을 모두 갖춘 봉황새를 닮았다.

봉숭아는 여름이 시작될 때부터 꽃을 피워 다른 여름살이들이 차츰 자취를 감출 때까지 잇달아 꽃을 보여준다. 분홍, 선홍, 보라 그리고 흰색이 골고루 섞여 피어나는데 봉숭아의 여리디 여린 꽃잎은 참하고 소박한 고향 소녀를 연상케 한다.

봉숭아꽃물 들이기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나라에 유배간 충선왕이 어느날 밤 가야금을 타는 예쁜 소녀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꿈을 꿨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불길한 마음에 궁궐 안을 찬찬히 살펴보다 열 손가락에 하얀 천을 대고 실로 꽁꽁 동여맨 한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는 자신이 충선왕을 섬기는 신하의 딸이라며, 고국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한탄하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와 자신 모두 눈이 멀었다고 말했다. 핏빛으로 멍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손톱에 붉은 봉숭아물을 들였노라고도 했다.
고려로 환국한 왕은 소녀의 마음을 기리는 뜻에서 궁궐 안에 봉숭아를 많이 심게 했다. <동국세시기>에는 봉숭아로 손톱에 물을 들이는 것은 손톱을 아름답게 하려는 여인의 마음에다, 붉은색이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믿음에서 악귀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민간신앙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고 적었다.

변변한 화장품이 드물던 시절, 봉숭아꽃물 들이기는 소녀나 여인들에겐 미용법이자 여름철을 나는 ‘의식’이기도 했다.

장마가 그친 여름날, 어머니는 마당에 핀 봉숭아 꽃잎을 따서 손톱마다 꽃물을 들여주셨다. 요즘 매니큐어처럼 한번 쓱 발라 말리는 것이 아니라 하룻밤이 걸리는 의식이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수박으로 입가심도 한 다음에 모깃불을 피운 마루에 앉아 어머니는 정성껏 딴 꽃잎에 백반을 넣고 함께 찧으셨다. 백반과 어우러진 꽃잎을 손톱에 얹고 비닐을 덮은 뒤 무명실로 꽁꽁 감싼다. 손톱에 싸맨 꽃잎이 행여 흩어질세라 양 손을 세워 호호 불어보기도 하고, 어떤 빛깔로 물들여질지 상상하며 여름밤을 보냈다.
‘봉숭아꽃물이 첫 눈 오는 날까지 손톱에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에 자꾸 손톱이 자라 봉숭아꽃물이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야속했던지…. 신기한 것은 장미처럼 빨간 빛깔이 더 선명한 꽃도 많지만 봉숭아꽃처럼 곱게 물들지 않는다는 거다.

이런 꽃잎으로는 억지로 물들여도 금세 물이 빠져 버린다. 어느 해엔 백반을 잘못 넣어 빛깔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어느 해엔 너무 오랜 시간 놔두어 손가락까지 주황색으로 물들어 손 내밀기가 쑥스럽기도 했다.

봉숭아꽃물을 들이는 일은 손톱이 아니라 시간을 물들이는 일이다. 물들여진 시간은 추억을 남긴다. 요즘엔 마트에서도,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봉숭아꽃물을 들일 수 있는 상품을 판다.

하지만 여름밤에 우리 손톱에 꽃잎을 얹고 정성껏 싸매주던 어머니의 손길, 혹시라도 꽃잎이 손가락에서 빠질까봐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던 인내심은 그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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