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34) 아이스케키와 아이스크림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매미는 울어대고 등목을 해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 한여름 오후가 되면 꽁꽁 언 하드 생각이 간절했다.
더위에 지쳐 풀이 죽어갈 무렵,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오라며 돈을 쥐여줬다. 하드 생각에 부리나케 가게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는 보냉통 뚜껑을 열고 얼음주머니를 뺀 다음 깊숙이 손을 넣어 하얗게 김이 서린 하드와 콘을 빼냈다.
식구 수대로 아이스크림을 비닐봉지에 넣고 계산을 한 다음, 혹여 아이스크림이 녹을까봐 뛰어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아이스케키를 사먹기 위해 몰려든 아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냉동기술이 발달하고 상점마다 냉동쇼케이스가 보급되기 전만 해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서양에서도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산업화됐으며 한반도에는 일제시대 들어 소개됐다.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판 곳은 조선호텔로 알려져 있지만 아이스크림이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63년 삼강산업(롯데삼강의 전신)이 국내 최초의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인 ‘삼강하드’를 출시하기 전까지, 시중에 유통된 아이스크림은 물에 설탕과 사카린을 섞어 얼리거나 팥앙금과 팥물을 넣어 만든 아이스바 타입의 ‘아이스케키’가 주종을 이루었다.
한여름이면 아이스케키라고 쓰인 나무상자를 둘러멘 까까머리 고학생들이 이를 팔러다니곤 했다.

그러나 62년 식품위생법이 시행되면서 아이스케키는 불량식품의 대명사가 되어 추방해야 할 품목으로 인식됐고, 이후 최신 설비를 갖춘 아이스크림 생산업체들이 생겨났다. 초기 삼강하드처럼 얼음이 많은 아이스바가 많았지만, 차츰 유가공기술 및 냉동기술이 발달하면서, 유지방 함량이 높은 고급 아이스크림이 출현했다.
대일유업(빙그레의 전신)은 74년 독자기술로 아이스크림 ‘퍼모스트 투게더(현 투게더)’를 내놓았고 이 밖에 ‘아맛나’ ‘비비빅’ ‘누가바’ ‘바밤바’ ‘쌍쌍바’ ‘쮸쮸바’ ‘조안나’ ‘브라보콘’ ‘싸만코’ 등 현재까지도 장수상품으로 군림하는 상당수의 아이스크림이 70년대 탄생했다.
아이스바, 콘, 짜먹는 튜브형, 과자나 빵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끼운 샌드형, 가족을 위한 대용량 컵제품 등 현재 출시되는 아이스크림 유형 또한 대부분 이 시기에 출시됐다.

70~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최고의 아이스크림은 ‘쮸쮸바’와 우유맛이 강한 ‘서주아이스주’였지만, 어린이들의 로망은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이 섞인 ‘월드콘’과 ‘구구콘’ 등이었다.

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아이스크림의 고급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90년대 이후 원유함량을 높이거나 견과류와 과일의 비율을 높인 아이스크림이 속속 출현해 인기를 얻었다.
92년 당시 희귀과일인 멜론의 맛을 아이스바로 재현한 ‘메로나’는 그해 매출액만 200억원으로 아이스크림시장을 석권했으며 이후 20여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아이스크림도 바로 메로나였다.
현재 아이스크림업계를 통틀어, 부동의 1위는 2003년 출시된 ‘설레임’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어린 시절 ‘쮸쮸바’를 먹고 자란 성인세대들이 먹기에 간편하도록 패키지를 만든 것이 소비자 공략에 유효했다는 분석이다.

기술의 발달,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제 아이스크림의 비수기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아이스크림의 최대 성수기는 여름철이다. 그러나 장마가 길어지면 아이스크림 매출액은 떨어진다.
장마가 길었던 지난해 아이스크림 시장의 매출액은 전년도인 2008년의 1조2000억원에 비해 1000억원가량 줄어든 1조1000억원이었다. 이는 현재 아이스크림업계의 빅4로 불리는 롯데제과, 롯데삼강, 빙그레, 해태제과의 매출액을 더한 수치이며 업계에서는 해마다 5%가량 성장하는 것으로 본다.

63년 처음 출시됐던 ‘삼강하드’의 가격은 20원. 당시에도 식사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라면보다 비싼 먹거리였다. 요즘 아이스크림 값도 만만치 않다. 700원, 1000원, 1500원으로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다음달 초부터는 권장소비자가 표시를 없애는 ‘오픈프라이스’ 제도가 시행돼 소비자들로서는 치솟는 가격이 부담스럽다. 가게 앞에 자리한 아이스크림 쇼케이스를 볼 때마다, 동전 몇 개면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수 있던 어린 시절이 행복했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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