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36) 바캉스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또다시 돌아왔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연중행사 바캉스의 계절이.

치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바캉스가 여름철 마쳐야 하는 ‘숙제’처럼 돼버린 탓이다. 원하는 때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는 서구 노동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에겐 여름철이 사나흘 이상 휴가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니 어쩌랴.

바캉스(vacance)는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라틴어로 ‘비어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방학·휴가를 뜻하는 vacation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를 숭배하다시피하는 한국이지만, 바캉스만큼은 영어 vacation과 holiday를 눌렀다. 왜? 프랑스어가 좀 더 ‘폼’ 나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푸른 바다에 뛰어든 바캉스족들이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역시 바캉스의 원조는 프랑스다. 좌파 연합체 인민전선이 집권한 뒤인 1936년 프랑스 노·사·정은 노동자의 임금 인상, 노동시간 주 40시간으로 단축, 연간 2주의 유급휴가 의무화 등을 담은 ‘마티뇽 합의’를 이뤄냈다.
이 같은 유급휴가의 보장은 프랑스인들의 여가생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바캉스 기간은 50년대에 3주, 60년대에 4주로 늘어났고 70년대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바캉스를 중요한 국가정책의 하나로 내걸며 독려하기도 했다.
80년대 집권한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유급휴가 기간을 5주로 늘렸는데, 근무연수나 직급에 따라 더 긴 휴가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프랑스인들은 여름휴가를 ‘그랑드 바캉스(grandes vacances)’라 부르며 만끽한다. 7~8월이면 인구 대이동이 일어나고, 도시의 상점들은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바캉스 목적지는 지중해 같은 바닷가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시골을 찾아 자신을 ‘비운다’. 수도원, 수녀원, 성당으로 명상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 바캉스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다.

그 이전에는 아이들이 방학하면 시골 친척집에 데리고 가 원두막에서 수박 나눠 먹거나, 강이나 계곡에서 물고기 잡는 정도가 피서의 대종이었다. 고도성장으로 소득수준이 오르고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바캉스를 위한 물리적 인프라가 생겨났다.
당시 가장 인기를 누리던 휴가지는 강릉 경포대와 부산 해운대였다. 제주도는 항공여행이 보편화되기 전이라 아직 대중적 휴가지로 떠오르지 않았을 무렵이다. 마이카족이 흔치 않던 시절, 고속버스 타고 대관령을 넘다 보면 멀미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주머니가 넉넉지 않거나, 며칠씩 휴가 내기 어려운 서울 사람들은 인천 송도 해수욕장에서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연월차휴가가 정착되면서, 유급 여름휴가는 직장인들의 권리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엔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 괌, 사이판 등이 인기 휴가지로 부상했다.

문제는 노동자의 ‘권리’이던 바캉스가 이제 일종의 ‘의무’가 돼버린 데 있다. 소파에서 뒹굴며 스포츠 중계나 보고 싶은 아버지, 호텔에 묵지 않는 한 ‘밥순이’ 노릇에서 못 벗어나는 어머니, 산이나 바다보다 컴퓨터게임과 만화영화가 좋은 아이들이 서로 눈치 보다 결국 짐을 꾸린다.
그러곤 주차장처럼 변한 도로에서 꾸벅꾸벅 졸고, 피서지의 바가지 상혼에 불평하고, 가족끼리 내 탓 네 탓 하며 다투기도 한다. 그런데도 해마다 여름이 되면, 다시 여행가방을 만지작거린다. 지난해와 다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를 ‘평등으로의 탈출’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평소 감히 넘보지 못하던 것들을 바캉스 땐 ‘질러도 되고’ 아니 ‘질러야만 한다’는 점에서, 즉 잠시나마 현실의 구조와 위계를 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바캉스를 떠난다는 것이다.

그래,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든, 컨디션이 별로이든, 붐비는 게 싫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상사로부터, 부하로부터, 컴퓨터로부터, 대차대조표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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