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33) 영화관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컴컴한 극장 안. 가슴이 콩닥거렸다. 청초한 모습의 강석우와 이미숙이 마침내 첫 키스를 하려는 참이다.
빨개진 귓불과 점점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자라목처럼 잔뜩 움츠리고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2초 전, 1초 전…. 실눈 뜨고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맛보려는데 “꺄악~, 엄마야” 옆에 앉아있던 친구 경희가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영문도 모른 채 함께 비명을 지르고 극장 안을 빠져나왔다. 친구는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의 이상한 행동(?)에 놀라 소리쳤다고 했다. “지지배, 1초만 늦게 소리지르면 안됐냐. 너 때문에 못 봤잖아!” 속상했다.

‘탈선’에 목말랐던 시절, 선생님의 철통 같은 수비를 뚫고 야간 자율학습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영화 <겨울나그네>를 보려고 ‘청소년 관람불가’의 사선도 넘었건만.
미처 보지 못한 그 삼삼한 장면을 애써 그려보며 친구와 신당동 떡볶이를 4인분이나 먹어치웠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신당동 동시상영관 동화극장에서의 추억은 약간의 공포와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 동시상영관 전경. 영화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 영화간판 그림은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보증수표였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극장에 얽힌 추억 한 자락 없는 이가 어디 있으랴. 지금은 중년이 됐을 1980년대 까까머리 남학생들은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 <애마부인> 등을 보기 위해 기꺼이 학교 담을 넘었다.
부리나케 극장문을 드나들던 ‘헐리우드 키드’ 가운데는 후에 한국영화를 이끈 주역도 여럿 있다. 극장은 사춘기의 해방구인 동시에 청춘남녀의 필수 데이트 장소였으며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울고 웃던 삶의 유희공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은 단성사다.

1907년 문을 연 단성사는 한국에서 제작된 첫 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리랑>(1926), <춘향전>(1935) 등 민족정서가 담긴 영화를 상영했다.
1910년 고등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서울 종로 우미관도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견디게 해줬다. 2층 벽돌건물로 1000여명을 수용할 정도로 컸고 주로 조선인 관객이 찾았다.

우미관과 그 뒷골목, 인근의 관철여관은 김두한과 종로 깡패들의 본거지로도 유명했다. 20~30년대 무성영화가 상영되며 영화가 일반 대중에 인기를 끌면서 영화관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지금의 편의점처럼 사람 발길이 잦은 곳에는 크고 작은 규모의 극장들이 흔했다. 지정좌석이 따로 없던 시절, 서로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관리인들의 눈을 피해 몇 회를 연속해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제법 규모가 큰 극장 문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기도’가 나와있었다.

전국민에게 사랑받던 영화관이 강력한 라이벌을 맞은 것은 국산 흑백 TV가 생산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이다. 이후 80년 컬러TV 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극장은 집집마다의 ‘안방극장’에 전국민 최대의 오락관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맞게 극장들도 변신에 나섰다. 9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편리하고 깔끔한 시설을 갖춘 대형 멀티플렉스들이 등장했다. 반면 추억의 명소로 꼽히던 영화관들은 시대의 유물로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고유한 그들만의 이름도 소멸했다. 새로운 멀티플렉스는 하나같이 브랜드를 앞세워 CGV 압구정, 메가박스 신촌, 롯데시네마 영등포 등으로 불렸다.

2000년대 접어들며 화질 좋은 DVD 플레이어와 영화채널이 등장하면서 한때 영화관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3D영화 <아바타>의 경우처럼 극장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새 영화들이 나올 때면 대중들은 기꺼이 극장으로 몰려갔다.
<아바타>는 4D영화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4D영화관은 입체감 있는 3D영상물에 덧붙여 객석 의자의 진동이나 움직임, 바람과 수증기 등의 효과를 통해 영화 속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신개념 영화관이다.

중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관객과 영화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5D영화관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로 손바닥 위에서 간편히 영화를 볼 수 있는 첨단의 시대에, 영화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언젠가는 영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싶어 옛 극장을 찾아 헤매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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