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44) 고시생

김희연 기자


지난해 고시생과 관련한 씁쓸한 뉴스가 있었다. 서울 신림동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25년차 고시생이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유서나 타살의 흔적없이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 이 남성은 서울의 상위권 대학교 법학과 졸업생으로 지난 25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시험에 계속 낙방한 그는 생의 마지막 무렵에는 마음을 바꿔 법무사 시험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발견 당시 그의 책상에는 손때 묻은 법학 관련 서적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이 40대 중반 고시생의 안타까운 죽음 뒤로 고시에 인생을 올인하는 청춘들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고위공무원 채용제도인 고시제도가 60여년 만에 손질돼 점차 사라질 운명이다.
행정안전부는 행정고시 선발 비율을 2015년까지 50% 줄이는 방안을 내놓았고 당장 내년부터 5급 신규 공무원의 30%를 민간 전문가로 선발할 예정이다. 또 행정고시라는 말도 5급 공채로 대체된다. 외무고시 2013년 폐지, 로스쿨법으로 사법시험 2017년 폐지 일정이 발표됐다.


 


서울 신림동의 고시촌에서 한 고시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예전에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진짜 고시생’의 공부방이던 고시원이
이제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와 백수들의 값싼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린시절 큰집에 놀러갈 때면 대문에 들어서면서부터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인사를 잘한답시고 큰소리로 “큰엄마! 저 왔~” 했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미닫이 문도 조용히 열고 닫았다.
왜냐면 큰집의 장남인, 사촌오빠가 고시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제삿날에도 사촌오빠는 꼼짝을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제사가 막 시작될 때야 문을 열고 나왔다. 사촌오빠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도 유별나 그때는 사촌오빠가 집안의 제일 큰어른인 줄 알았다.
특별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한 집안의 명운을 짊어진 그 어깨의 짐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현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개천에서 수많은 ‘용들’이 탄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등 고시관문을 통과한 이들이다.
한국사회에서 고시는 지난 60여년간 ‘출세’와 동일어로 통했다. 어른들이 “너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남자 아이들은 목청 높여 “대통령이요, 판사·검사요!” 했다.
판·검사 일이 무엇인지 잘 몰랐어도 그래야 친척 어른들은 흐뭇해하며 용돈을 쥐여줬다.

“집안에 판사나 검사 한명은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인식에는 가문부흥의 열망이 담겨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로서 오랫동안 휘둘려온 이들만의 강한 방어적 생존욕구가 반영돼 있다.
자신의 한 맺힌 삶에서 자식들만이라도 벗어나길 바랐던 늙은 부모들은 대학생 자식의 등록금으로 논·밭을 팔고 소까지 내다팔며 ‘우골탑’을 쌓은 후에도 또 한참동안 고시생이 된 자식을 위해 기꺼이 뒷바라지했다.
한때는 ‘고시생’이 하나의 신분처럼 여겨져 그 타이틀만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그 탓에 여성들을 희롱한 고시생이 가짜로 들통났다는 저녁뉴스가 심심찮게 나왔다.

고시생은 TV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기도 했다. 드라마 제목은 달라도 스토리는 대충 비슷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법대생이 된 남자 주인공은 온순하고 희생적인 한 여인을 만난다.
이 여인은 물심양면 뒷바라지한다. 주인공은 수석으로 사시에 합격하고 얼마안가 부잣집 딸과 결혼한다. 비운의 여자친구는 버림받고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자취를 감추고….
몇년 후 아들을 데리고 나타난다. 멜로복수극은 대강 이렇게 흘렀다. <모래시계>처럼 부패한 사회에 정의감을 불태운 검사가 등장한 드라마도 있긴 하다.

‘고시원’ ‘고시텔’ 등이 밀집된 고시촌도 많이 변했다.

신림동 고시촌이 만들어진 것은 1980년대 초다. 서울대가 이전해오면서 서울대생은 물론 전국에서 올라온 고시지망생들이 몰려들며 형성됐다. 과거에는 공부로 얼굴이 누렇게 뜬 고시생들의 동네였지만 요즘은 싼값에 잠자리를 해결하려는 대학생, 직업을 구하지 못한 청년·중년 백수들의 잠자리가 됐다.

1960년대 한 신문을 보자. 한여름 법대 도서관 풍경을 묘사한 글에는 ‘내일의 판검사들이 꼬박 18시간을 앉아 굉장뻑적지근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쓰여있다. 이렇듯 ‘굉장뻑적지근한’ 공부로 외시, 사시, 행시 수석 3관왕 또는 2관왕을 하며 한국사회의 성공신화를 만들어온 고시가 사라진다고 하니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라지는 김에 끝내 용이 되지 못한 고시생들의 눈물과 한도 함께 가져갔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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