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6) B·C급 전범과 시베리아 억류자의 한

ㆍ강제징용된 조선 청년들, 일제 희생양으로 ‘전범의 굴레’

아리미쓰 겐 |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익숙지 않을지 모르겠다. 1945년 이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을 강요당했다. 강제징용 뒤 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으로 끌려가 포로감시원으로 일하며, ‘한국 간수(Korean Guard)’라고 불린 이들은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 청년들이었다.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청년들이 부족한 전투요원을 메우기 위해 포로감시원으로 징집됐다.일본은 태평양전쟁 초기의 승리로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 등 많은 연합군 포로를 붙잡았으나 포로 처우에 관한 아무런 체제나 방법이 없었다. 포로 처우에 관한 국제인도법(제네바 조약)에 관해 일본군 병사나 포로감시원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포로를 다루는 데 많은 문제가 생겼으며, 특히 수많은 연합군 포로가 사망하거나 학대를 당했다.



 


이병주 한국시베리아삭풍회 회장(오른쪽) 등이 2009년 10월30일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전후 각지에서 실시된 군사재판에서 포로 학대 문제를 다룸에 따라 직접 현장에 있던 조선·대만인 포로감시원들은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처벌됐다. 수용소장 등 지휘관뿐 아니라 그들의 명령을 받아 실제로 포로와 대치한 포로감시원들이 일본 전쟁범죄의 책임을 뒤집어쓴 것이다. ‘통상의 전쟁범죄’, 즉 ‘B·C급 전범’으로 몰려 유죄판결을 받은 일본군 장교·병사·군속은 5700명이다. 이 중 984명이 사형 판결을 받아 934명이 처형당하고, 3519명이 종신형과 유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148명이며, 대다수(129명)가 포로감시원이었다.




사형을 면한 사람도 당초 복역하던 싱가포르나 자카르타 수용소에서 도쿄의 유명한 ‘스가모 형무소’로 송치됐다. 그들은 조선에서 동원됐기 때문에 종전과 더불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한 시점에서는 응당 조선·한국이라는 국적을 회복하고 조국으로 송환되는 것이 합당했다. 그럼에도 조선인 B·C급 전범들은 현지와 도쿄에서 석방되지 못한 채 일본인으로서 책임을 추궁당하고 일본을 대신해 형벌을 받은 것이다.




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재일조선인은 조선·한국 국적을 되찾았으나 수감 중이던 조선인 B·C급 전범은 여전히 일본인으로서 속죄를 강요당했다. 최후의 조선인 B·C급 전범자가 ‘스가모 형무소’에서 가석방으로 출소한 것은 57년 4월이었다. 직업도, 먹고 살 집도, 아는 사람이나 가족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전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고향이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결국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일본에서 살게 된다. 석방 후 2명이 생활고로 목을 매거나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어떤 이는 정신병을 앓고, 또 어떤 이는 격리병동에서 78년의 한 많은 생애를 마치기도 했다.




물론 피해자들이 이를 말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일부 조선인 B·C급 전범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55년 4월 약 70명이 참여한 ‘한국출신전범자 동진회’를 만들어 기본적 인권·생활권 확보를 위해 일본 정부와 교섭했다. 이들은 당시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에게 조기 석방, 일본인 전범이라는 차별대우 철폐, 출소 후의 생활보장, 유골 송환 등 국가보상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지금까지 운동의 선두에 있는 이학래 동진회 회장(83)은 올 1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에게도 요망서를 제출했다. 현 총리의 조부였던 하토야마 이치로 이래 역대 일본 총리 24명을 상대로 요망서를 제출해 온 연장선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91년부터 도쿄 지방재판소에 국가를 상대로 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제소했지만, 99년 최고재판소에서 기각당했다.




이 와중에서 지방재판소·고등재판소·최고재판소는 공히 원고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고 입법을 통한 해결을 촉구했다. 2000년 이후에는 입법운동을 펼쳤다. 마침내 2008년 5월 민주당 중의원은 한국·조선·대만 국적의 전(前) B·C급 전범자·유족을 대상으로 한 ‘특정연합국재판피구금자특별급부금지급법안’을 제출했다. B·C급 전범자와 유족 1명당 300만엔의 특별급부금을 지급하는 법안이었다. 그러나 법안은 지난해 7월 중의원 해산에 따라 자동 폐지됐다. 당시 공산·사민당도 이 법안에 찬성한다는 방침을 세운 바 있다.




한국 정부에서는 2006년 국무총리실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를 벌인 끝에 한국인 B·C급 전범자를 ‘동원 피해자’로 인정하고 명예회복 추진에 나섰다. 일례로 한국의 B·C급 전범자 유족이 만든 동진회 한국지부가 결성됐다.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 위령제가 지난해 경기 연천군 전곡리 38선 기념탑에서 열렸다.





동남아시아로 송환돼 온갖 수모를 당한 조선인 청년과 반대로 북쪽 최전선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들도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부족한 일본군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모조리 동원’하고 징집한 결과다. 이들은 훈련다운 훈련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무기도 탄약도 없는 가운데 45년 8월 소련과 대치하던 중국 동북부(만주)의 최전선으로 끌려갔다. 일본이 패전하기 바로 엿새 전인 8월9일 압도적인 화력과 무력을 앞세운 소련군이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자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이들 역시 45년 8월 일본 패전과 함께 조선·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남쪽에 있는 한반도로 귀국·귀환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들에게 시베리아 극한지대에서 3년반이나 강제노동을 시켰다. 소련 병사들도, 일본군에 소속된 조선인 청년들도 포로 대우를 규정한 제네바 조약을 몰랐다. 여기서 참혹한 비극이 일어났다. 영하 40도를 넘는 추위 속에서 식량 및 의약품이 부족하고 열악한 주거환경에 방치된 채 많은 포로들이 숨을 거두었다.




이 중 일부가 48년 12월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은 배로 나홋카를 출발해 흥남항에 도착했다. 중국 동북부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북으로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38선을 넘어 남으로 돌아가려 한 조선인 청년도 500명 정도였다. 그러나 49년 2월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38선의 긴장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들의 귀환을 사전에 연락을 받지 못한 남한 주둔 미군들은 38선을 넘는 이들에게 발포해 유혈사태를 불렀고, 많은 청년들이 남쪽 고향을 눈앞에 두고 억울하게 죽어갔다.




구사일생으로 남에 도착한 청년들을 기다린 것은 경찰과 공안당국의 집요한 취조, 남쪽 사회의 차별과 편견이었다. 대부분 ‘시베리아에서의 귀환’을 숨기고 살았으며 ‘북에서 온 간첩’이라는 오명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사회적으로 당당하게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90년 소련과 한국이 국교를 회복한 이후였다. 90년 12월에 ‘한국시베리아 삭풍회’가 결성되고 약 60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반응은 싸늘했고, 급기야 2003년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그러나 다른 재판과 마찬가지로 도쿄 지방재판소와 고등재판소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고, 현재 최고재판소에 상고한 상태지만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기 그지없다. 한국시베리아 삭풍회의 이병주 회장(85)은 지난해 10월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다음날 일본인 전(前) 억류자와 함께 도쿄의 총리 관저를 방문, 하토야마 총리의 보좌관에게 직접 호소했다. 그렇지만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 정부는 지금도 대응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일한 희망은 일본인 전 억류자를 대상으로 한 ‘전후강제억류자특별조치법안’이 초당파적인 의원 제안으로 일본 의회에서 성안되는 것이다. 여당인 민주당의 다수 의원과 사민·국민·공산당 의원들이 일본인 전 억류자뿐만 아니라 조선·한국인, 중국·대만인 전 억류자에게도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보상이 실시돼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외국 국적의 전 억류자에게도 일정한 조치를 취할 법안이 가을 임시의회에 제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병으로서의 복무가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데도 패전의 책임을 떠맡아 3년반이나 소련을 위해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것은 부당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며, 국제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였다.




러시아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보상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치·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신뢰받는 파트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피해 당사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일본군 조선인 포로감시원



일본 육군은 1942년 포로의 경계·감시를 위해 조선인·대만인 특수부대 편성 계획을 세운다. 이후 신문 등에 공고, 20~35세의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모집에 나섰다. 2년 계약의 ‘군속용인(軍屬傭人)’이라는 자격이었다. 정식 명칭은 ‘부로 감시원’이라고 했다. 1개월 만에 조선 각지에서 3000명 이상을 모았다. 부산의 ‘임시 군속 교육대(통칭 노구치 부대)’에서 2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받았지만, ;.포로 취급을 규정하고 있는 제네바 조약은 배우지 않았다. 그후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 보내져 포로들에 대한 경계·감시 업무를 맡았다. 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 제10조에 ‘포로를 학대하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전쟁범죄인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가한다’고 명기됐고, 전후 군사재판에서는 포로 학대 혐의를 엄격하게 추궁하면서 소추·처벌했다. 그러나 연합국 포로였던 피해자 측의 증언에 부정확한 것이 많아 개인적 기억이나 감정에 좌우돼 왜곡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포로 수용 정책은 일본군 중추가 결정한 것이어서 무리한 포로의 노동이나 이동을 강요한 책임은 군 상층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장 감시원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심히 부당했다.



■ 글쓴이 아리미쓰 겐은



아리미쓰 겐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는 1990년대부터 일본 안팎의 전쟁 피해자 재판이나 입법 지원 활동을 펴오고 있다. ‘동진회를 응원하는 모임’ 간사, 시베리아 입법추진회의 간사,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 사무국장, ‘전후 처리의 입법을 요구하는 법률가·유식자의 모임’ 사무국장 등도 맡고 있다.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