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8) 후지코시 여자근로정신대 끝나지 않은 싸움

ㆍ‘쇠 깎는 공장’ 끌려간 어린 딸들, 아직도 ‘뼈 깎는 고통’


나카가와 미유키 | 호쿠리쿠연락회 도야마 사무국장



‘도야마에 올 땐 기뻤네. 하룻밤 지새니 슬퍼지네. 언제쯤 이 공장을 떠날 수 있을까. 아~ 아~ 숨어서 우는 눈물아.’ 65년 전, 공장 인근의 다테야마(立山·일본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산)를 바라볼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소녀들이 있었다. 일본 도야마의 군수공장인 후지코시에 ‘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 연행당한 한국인 소녀들이다. 그 피해자들은 지금 한국인 강제연행 소송의 마지막인 ‘후지코시 소송’에서 싸우고 있다.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선반으로 쇠를 깎는 중노동을 하고 있다. | 나카가와 미유키 제공




기계공구 제조사인 후지코시는 1928년 도야마 시에서 창업했다. 그 후 항공기나 군함 등의 무기 부품을 생산하면서 군수공장으로 발전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전황이 악화되면서 후지코시는 부족한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의 소녀들을 징용할 수 있도록 군부에 로비를 한다. 곧이어 1944년, 직접 한국으로 가 어린 아이들을 연행한다. 후지코시 사사(社史)에 따르면 그 수가 여자 1090명, 남자 540명 등 모두 1600명을 넘는다. 한국인 여자징용공 수로는 전국 최대 규모다.




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임금마저 착취했다. 후지코시는 침략전쟁의 적극 가담자를 자청하고, 어린 소녀들을 강제 연행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전범 기업이다. 패전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막대한 전시보상 혜택을 받아 살아남았다.




후지코시 상표인 ‘NACHI(나치)’는 쇼와(昭和) 일왕이 타고 다닌 배 ‘나치(那智)’에서 인용한 것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아직 ‘천황’을 숭배하고 국가와 혼연일체가 돼 침략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일절 반성도 하지 않는 기업임을 자임하는 셈이다.




한국에서 후지코시로 강제 연행당한 피해자들은 소학교를 졸업할 즈음인 만 12~15세의 소녀들이었다. 후지코시는 학교나 행정기관을 통해 ‘후지코시에 가면 여학교에 다닐 수 있다’ ‘꽃꽂이나 타자도 배울 수 있다’ ‘돈을 벌 수 있다’고 유혹했다. 당시 상황에서 여학교에 진학한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철저한 황민화 교육을 받은 소녀들에게는 일본인 교사의 말이 절대적이었다. 물론 부모들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모집’ 형식을 취하며 실제로는 거부할 수 없는 상태로 연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행당한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혹독한 훈련과 중노동, 배고픔이었다. 후지코시에 도착해 처음 한 달 동안은 엄격한 군대식 훈련을 받았다. “뛰어!” “멈춰!”하는 군대식 구호가 끊이지 않는 행진 훈련이었다. 혹독한 훈련 속에 달리기가 느리다는 이유로 뺨을 맞아 아직 난청 후유증을 앓고 있는 피해자도 있다.




“선반으로 금속봉을 깎는 일을 했습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사과상자를 받침대로 썼지요. 기름 냄새와 기계 소음이 진동하는 가운데 하루 종일 선 채로 일을 했습니다. 할당된 양을 채우지 못하면 구타를 당했고요.” 밤낮 2교대에다 일주일마다 심야근무도 있었다. “같은 학교에서 연행당해 도중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지요.” 거의 매일 상처나 병이 도졌고 사망자도 나왔다. 삼엄한 감시 아래 편지조차 검문당했다. “식사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길가의 풀을 뜯어 먹어 설사를 하기도 했지요.” 임금을 1엔도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부모들이 준 용돈마저 빼앗아갔다. 너무 괴로워 도망치다 군인에게 붙잡힌 뒤 ‘위안부’가 된 강덕경씨는 원래 후지코시에 강제 연행당했던 사람이다.




1945년 7월, 약 420명의 소녀들은 “황해도 사리원에 공장을 만든다”는 후지코시의 말에 따라 조선으로 송환된 후 “한 달 휴가를 준다”는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 기다린다. 그 사이 해방을 맞이했다. 도야마에 남은 소녀들은 공습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계속 일을 하다 10월쯤 귀국한다. 해방 65년을 맞은 지금도 피해자들은 육체적·정신적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정신대=위안부’라며 남편에게 이혼당한 사람도 있다.




피해자들은 전후 처음으로 후지코시를 방문했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문전박대였다. 이에 1992년 9월30일 피해자 3명이 후지코시에게 사죄·보상·미지급 임금을 요구하며 도야마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후지코시는 당초 원고들이 일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했다. 1심은 시효에 따라 기각됐다.




원고단은 윤봉길 의사가 잠들어 있는 도야마의 위령비에 참배한 뒤 제2의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100년 소송선언’을 발표했다. ‘전쟁책임을 지지 않는 후지코시를 타도한다’는 결의를 한 후 후지코시 정문 앞 단식투쟁을 시작으로 단호한 운동을 벌여나갔다.




2심마저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기각됐다. 원고단은 일본 재판제도의 악랄함을 규탄하며 문 앞 투쟁과 국제노동기구(ILO) 투쟁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결국 후지코시는 원고단과 지원회의 총공세로 궁지에 몰리자 원고단에게 화해를 청했다. 원고단은 원고 이외의 후지코시 강제연행 피해자도 화해교섭에 추가시킬 것을 요구하며 투쟁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00년 7월11일 최고재판소에서는 화해조서를 양측에 전달하기에 이른다.




후지코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가 2심 판결 패소 후 일본 재판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끌려가고 있다.




일본 사법부는 전쟁범죄로부터 도피하고 있으며, 최고재판소는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동의 요새’가 돼 버렸다. 이 때문에 법 테두리 안에서의 투쟁은 패배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제1차 소송 때처럼 기업을 철저히 추궁하고 총공세를 펼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값진 교훈을 얻게 됐다.




1차 투쟁의 승리로 30명 이상의 피해자들이 커밍아웃을 했다. 2003년 4월1일, 피해자 23명이 원고가 되어 후지코시와 일본 국가를 상대로 제2차 소송을 제기하지만, 1심 판결에 이어 2심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기각한다는 부당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재판은 투쟁의 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판결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후지코시는 강제연행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피해자들은 후지코시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사회적 포위망을 만들어왔다.




지난해 10월과 12월, 올해 3월 세 차례에 걸쳐 원고단은 도야마 후지코시 본사 정문 앞에서 장기농성 투쟁을 전개했다. 후지코시 측은 사원들을 쪽문으로 출퇴근시키고, 방문객은 뒷문으로 우회시키는 등 자신들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여실히 드러냈다.




원고단은 후지코시 도쿄 본사에 의견서를 제출하는 투쟁과 도쿄 시나가와 역 앞에서 노조 등과 함께 수도권 외국인노동자를 지원하는 가두홍보 운동을 벌였다. 한국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 세계에 있는 후지코시 거래 회사에 실상을 알리는 팩스 보내기 운동도 시작했다.




판결 다음날인 3월9일은 진눈깨비가 내렸지만 후지코시 공장 정문 앞에서 전국 집회를 열고, 전국에서 모인 지원자와 함께 농성에 들어갔다. 나나오 중국인강제연행소송의 원고단도 동참해 “일본의 침략전쟁 책임을 함께 추궁하고 투쟁하자”고 결의했다. 원고단은 3월12일 도쿄로 옮겨 한국인강제연행문제 전반의 해결을 요구하며 일본정부 앞으로 보내는 요망서를 곤노 아즈마 민주당 부간사장에게 제출했다.




일본정부는 올 3월 한국정부에 공탁자명부를 전달했지만 이것으로 끝내려 한다면 큰 오산이다. 일본정부는 우선 침략과 식민지배의 모든 범죄를 철저히 조사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탁자명부에 기재돼 있지 않은 수많은 사망자가 일본 어딘가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침목 1개에 조선인 1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열도는 한국인의 피로 물들어 있다. 강제연행 당시 어리디 어렸던 원고들은 어느덧 80대가 되어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살아있는 증인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투쟁 뒤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인한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과 미처 싸우지도 못하고 숨진 수많은 동포들의 ‘한’이 서려있다.


 


■ 글쓴이 나카가와 미유키는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노동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도야마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0년대는 학생운동을, 1990년대부터 제1차 후지코시 소송의 지원과 평화운동을 벌여왔다.




■ 호쿠리쿠연락회



제2차 후지코시 강제연행·강제노동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는 2002년 3월 호쿠리쿠의 도야마, 이시가와, 후쿠이 등 3개 현을 중심으로 창립한 시민단체이다. 2차 소송 제기와 때를 맞춰 참정권소송 원고(재일동포), 야스쿠니위헌소송 원고인 목사 등이 모임을 주도했다. 일반 시민들과 소송을 준비하는 변호인단을 망라하고 있다. 재판이 열릴 때에는 회원들이 각지에서 방청을 하러 온다. 지원회는 원고단이 방일할 때에는 원고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후지코시 문앞 투쟁이나 도쿄 투쟁을 벌이고 있다. 재판지원 활동과 함께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학습회와 강연회 등을 기획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