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7)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ㆍ日권력자들, 천재지변 공포 속 조선인을 정국수습 도구로
ㆍ재일한국인 6000여명 유언비어로 ‘불령선인’ 낙인, 日 자경단 등에 처참히 살해


김종수 | 1923간토시민연대 한국상임대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한·일·재일 시민의 네 번째 공동현장연구가 시작되던 2009년 8월11일 새벽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곤히 잠든 연구단원들을 깨운 것은 지진이었다. 몇 차례 호텔을 심하게 흔들어놓자 연구단원들은 사색이 되어 아연 긴장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1923년 9월의 첫날에 일어난 지진 공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도쿄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도시 바람이 몰려 한낮의 최고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돈다는 사이타마현의 기온이 전날 쏟아진 소나기로 예상보다 낮아 다행이었다.




구학영의 묘비에 학살 날짜와 고향 주소가 쓰여 있다.




사이타마의 하치코선 고다마 역에서 20분 떨어진 정수원(正樹院) 묘지로 들어가자 그곳에 한국인의 묘가 있었다. 묘비에는 ‘조선 경남 울산군 상면 산전리 속명 구학영. 향년 28세’(朝鮮 慶南 蔚山郡 廂面 山田里 俗名 具學永. 行年 28才)라고 쓰여 있다. 살해당할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한국의 젊은이 구학영의 묘였다.




왜 여기에 한국인의 묘가 있는 것일까? 1923년 9월1일 일본 간토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고 도쿄지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너나없이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인데, 그 와중에 난데없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집에 들어가 부녀자를 겁탈하고 강도짓을 일삼는다. 불령한 조선인들이 산업시설을 폭파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전역에 나돌았다.




이틀 뒤인 3일 오사토 군청으로부터 요리이마치와 그 주변 마을에 자경단 결성 지시가 내려졌다. 5일에는 진보하라에서 군중에게 습격을 당한 한 경찰관이 도망쳐 왔고, 그가 ‘불령선인(不逞鮮人)’ 집단의 스파이라고 오해를 샀던 일도 있었다. 혼조의 조선인 학살사건도 마을에 전해지는 바람에 군중은 꽤 흥분해 있었다. 그 군중이 사쿠라자와무라의 목재소인 마시타야에 있던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을 죽이려고 갔다.




그러나 구씨는 당시의 상황에 위협을 느껴, 요리이 경찰분서로 가서 보호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이를 알게 된 요도무라(用土村), 하나조노무라(花園村) 등지의 자경단이 6일 경찰분서를 습격해 구씨를 일본도와 괭이로 살해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왜 엿장수 구학영을 죽였을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조선(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있던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을 주로 저질렀지만, 대량학살의 희생은 대부분 재일조선(한국)인들이었다. 조선(한국)인 모두를 ‘요주의 인물-불령선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쇼나이신보 1923년 9월3일자 호외. 조선인들에 대한 이 같은 날조 기사가 조선인 학살이 확대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기사내용: 불령선인(불령한 조선인을 뜻함) 및 주의자(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뜻함) 일파는 그 후 창궐이 극심해, 3일 오전 11시 300여명이 폭탄을 던지거나 방화하여, 근위사단의 3개 중대와 왕자 부근에서 충돌, 난투를 벌인 결과 30여명이 체포되었다. 같은 날 오전 4시 400명의 같은 조선인들이 폭탄을 가지고 요코하마 방면으로부터 습격해 토벌 1개 중대는 소수이므로 전멸할 것 같은 공포를 느껴 3개 연대의 2개 중대가 급거 자동차를 나누어 타고 지원을 왔고, 또 에치고 다카다 13사단도 출동명령이 내려지자 바로 도쿄로 급파했다. 계속해서 피난해 오는 자에 따르면 이 폭도의 일부는 폭탄을 던지고 방화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검거, 기소된 사람은 요도무라 출신이 12명, 하나조노무라 출신이 1명이었다. 1심에서 실형 판결을 받았지만, 이는 조선인을 살해했다는 이유라기보다는 경찰에 반항한 자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한다는 임시지진구호사무국경비부 사법위원회의 방침이 재판에서 관철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피고인은 ‘일종의 향토 희생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재판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마을에서 보전해 주었다. 또한 경찰서 습격과 조선인 학살에 앞장섰던 요도무라 촌장은 ‘자경단 결성을 군청이 지령했다’는 사실을 들어 내무대신에게 항의서를 낸 뒤 ‘재판비용부터 피고의 생활비’까지 보조받게 하였다.




이들 피고를 재판한 법정기록을 보면 재판장의 농담어린 표현과 피고의 죄의식 없는 답변에서 왜 일본인들이 수많은 조선(한국)인을 무참히 죽였는가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대화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를 위한 정당한 행위’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처럼 사이타마에서 학살당한 사람들만 해도 488명(1924년 12월5일자 독립신문)이었다. 한편, 살해당한 구학영의 묘비는 요리이마치의 안마업자였던 미야자와 기쿠지로를 대표로 몇몇 양심적 일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고, 후일 유족들을 위해 묘비에 주소까지 명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학살 희생자 구학영의 묘 앞에서 한·일·재일 시민들이 추도식을 갖고 있다. | 1923간토시민연대 제공



 

신주쿠 전철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도우바(塔婆·죽은 사람을 추도하는 길고 얇은 나무로 만든 비)를 들고 가는 내 주변을 바람 스치듯 그렇게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우리도 무심하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을 그렇게 스쳐 지나왔으리라. 진상조사를 허락하지 않고 은폐와 왜곡으로 일관해 온 일본 정부로 말미암아, 그리고 해방 후에도 진상조사조차 한 번 하지 않은 대한민국 정부의 무심함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하면서 이렇게 무심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사건 발생 후 90년이 가까워 오는데, 여러분들이 구학영씨 묘를 찾은 고국의 첫 번째 사람들일지 모른다”는 재일동포 활동가의 말을 들으며 비석에 쓰인 구학영의 이름을 지워가는 것은 풍상과 눈비가 아니라 조국의 무관심이라는 생각이 들어 심한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가 나름 성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정부의 노력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군색한 한계 운운하며 이 사건을 마냥 덮어서야 어찌 국민이 국가를 믿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억울하게 죽어간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은 허울일 뿐이다.




1923년 9월 구학영을 끌어냈던 당시 요리이분서는 현재 지역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 박물관 2층에 이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 잘 보관돼 있으며, 당시 사건을 지역관장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학살된 구학영의 묘와 고향 주소까지 남겨진 비문 등 관련 증거만으로도 일본정부에 의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규명이 충분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대한민국 국회가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한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자료보존과 자료공개를 일본정부에 요청해야 한다. 아울러 한·일민관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해 하루빨리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일본정부가 유포한 유언비어에 의해 불명예스럽고 억울하게 학살된 한국(조선)인들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일본 속담에 ‘거짓말도 자꾸 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교과서로도 진실을 배울 수 없고, 대학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일제에 의한 조선인학살사건을 한·일·재일의 학생들이 함께 직접 눈으로 보게 하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도록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알기 때문이다.


 


■ 1923간토시민연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2007년 11월17일 결성된 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 일제 식민지범죄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 시민, 재일 코리안이 함께 연대하여 활동 중이며, 그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매년 정기 심포지엄과 현장방문여행을 하고 있다. 재일동포 사학자 강덕상, 일본사학자 야마다 쇼지, 한국사학자 서굉일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9월1일을 전후해 학살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추도비를 세우는 모임을 열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9월 첫 주간을 희생자를 기리는 기간으로 설정하고, 종교단체에 의한 추도행사를 갖고 있다. 학살희생자로 밝혀진 구학영, 강대흥의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하는 일과 한·일 양국에서 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돼 이른 시일 내에 한·일 민관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일을 선결과제로 삼고 있다.

■ 글쓴이 김종수는



관동대진재(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 한국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학살희생자 유가족을 찾는 일을 하면서 잊혀져가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매년 여름 ‘아시아청소년역사캠프’를 열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생명선교연대 국제협력위원장, 대안학교인 아힘나평화학교 교장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서로를 살리는 인권교육>이 있고, 일제하 강제연행사를 다룬 <지쿠호오이야기>를 기획 출판했다. 간토조선인제노사이드 100문100답을 집필 중이다. 한신대와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