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0) 독도문제 본질과 해결 방안은

ㆍ‘영토분쟁’ 부각땐 더 꼬여, ‘역사문제’로 풀어야 실마리


김점구 | 독도수호대 대표



1905년 8월19일, 독도 동도 정상에 작은 건물이 세워졌다. 러일전쟁에서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 해군이 세운 독도망루다. 독도망루는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905년 10월24일까지 약 2개월 동안 운영되다 철거됐다. 독도망루는 일본의 군사적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고,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첫 번째 일본 영토에 편입된 희생물이었다. 일본은 영토편입에 이은 독도망루 설치를 위해 내무성의 비밀문서(37비을 337호)에 따른 내각회의를 열었다. 내각회의에서는 독도를 주인이 없는 섬으로 정하고, 무주지 선점을 근거로 영토편입 결정을 했다. 내각 결정은 1905년 2월22일의 시마네현 고시로 현실화됐고, 해방이 될 때까지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무라촌 관할이 됐다.




시마네현은 시마네현 고시 100년이 되는 2005년에 ‘죽도의 날’을 제정해 영토편입을 정당한 절차라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 고시를 국제법상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무주지 선점론의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주지 선점론은 역으로 시마네현 고시 이전에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따라서 ‘국제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 영토였다’는 일본의 주장은 구조적으로 논리적 모순이다.




 
해군군령부가 작성한 군용전신연락일람도로 1904~1905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일본해동수역총합시설계획’에 따라 죽변에서 울릉도, 독도, 오키섬까지 해전전신을 연결했다. 오키섬과 시마네현은 1905년 11월9일 완료됐다. | 일본 방위연수소 전사실(戰史室) 소장




한·일 양국 갈등의 최대현안인 독도문제는 1952년 1월18일 대한민국 정부가 독도를 포함하는 ‘대한민국 인접 해양에 관한 주권선언’(평화선)을 통해 독도의 주권국임을 재확인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일본 정부는 ‘평화선 선언에 대한 어떠한 가정이나 청구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항의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6·25전쟁 중이었고, 일본 정부는 혼란을 틈타 무장한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독도에 파견했다. 심지어 독도에 상륙해 ‘일본 정부의 허락 없이 독도 상륙을 금지한다’는 목재 표식을 설치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 정부의 경찰관 파견, 학술조사, 등대설치 등 실효적 지배가 계속되자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인 독도가 분쟁지역이 될 수 없다며 일본 주장을 거절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ICJ 제소 제의 사실을 홈페이지와 자료집을 통해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그러나 독도와 달리 센카쿠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쿠릴열도에 대해서는 ICJ 제소를 통한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함께 우익단체의 독도 탈환시도가 이어졌다. 1959년 9월28일, 극우단체인 대일본정의국수회 등 24개 단체 회원 150여명이 선박 3척을 동원한 돌격대를 조직, 독도 상륙을 시도했다. 2004년 5월에는 일본사도회가 독도 점거를 시도하다 되돌아갔다. 일부 우익단체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독도를 탈환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매년 이른바 죽도의 날인 2월22일을 전후해 시마네현과 도쿄에서는 차량 수십대를 동원한 우익단체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주일한국대사관에서 현장취재를 하던 중 폭언과 함께 위협을 당했고, 충돌을 우려한 경찰의 제지로 접근을 차단당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도쿄시내 곳곳에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벽보가 붙고 있다. 시마네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죽도의 날 수일 전부터 전국의 우익단체가 집결해 연일 차량시위를 벌이고 죽도의 날에 항의하기 위해 시마네현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의 숙소를 찾아가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기념식장에서 우익단체의 선동적인 구호와 발언이 등장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독도문제는 한국 정부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본 정부를 상대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일본 국민이 가세할 전망이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과 달리 일본인의 독도에 대한 관심도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죽도의 날 제정과 교과서 개악,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독도 명기 등 교육 차원에서 독도문제가 다뤄지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오늘날 독도문제는 한·일 두 나라의 정치·외교 문제를 넘어 경제·사회·문화·민간교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기념식을 비롯해 외교청서·방위백서·해상보안청 리포트 등 일본 정부의 연례보고서 발행, 초·중·고교 교과서 검정, 학습지도요령(해설서) 발행 등이 정기적으로 반복됨으로써 갈등과 대립의 골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일본 언론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약 70%가 독도문제를 알고 있으며 이 가운데 70%는 일본 정부가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한·일 양국 사이에 독도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할 정도라며 관심사의 양적 팽창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대국민 홍보 강화와 문부과학성이 주도하는 교과서 왜곡과 교육의 효과를 간과한 결과다. ‘독도문제가 있다’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인식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한·일 양국 국민에 의한 ‘독도는 한국 땅’과 ‘독도는 일본 땅’의 충돌은 양국 정부의 외교적인 독도영유권 주장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일본 우익단체가 본격적으로 나설 경우 센카쿠제도와 같은 충돌사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독도문제는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와 같다.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이로 파생된 일본군위안부, 강제징용, 야스쿠니합사, 간토대지진, 군군재판, 재외동포 등 대일 과거사문제를 함께하는 한·일 시민사회단체의 네트워크는 있지만 독도문제를 현안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폭력과 탐욕에 의한 제국주의 침략의 문제, 즉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닌 국제법상의 영토문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영토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이므로 민간단체가 관여하는 것은 어렵다”였다. 다음으로 각 단체의 설립목적과 주요사업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특정분야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고 단체의 특성상 독도문제를 주요사업으로 다루기 어려운 현실적 문제도 있다.




양국 시민사회단체가 독도문제를 공동의제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2008년 2월 이후 시마네현의 움직임은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모인 우익단체가 하루 종일 시위를 계속하는 시마네현이라는 장소와 죽도의 날이라는 시기를 고려하면 의미는 더욱 심각해진다.




 
2008년 2월21일 시마네현립 산업교류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 필자 김점구씨가 ‘시마네현 고시와 죽도의 날의 불법성’에 대해 발표했으나 심포지엄은 비교적 평온하게 진행됐다.




죽도의 날 기념식이 열리기 하루 전, 기념식장인 시마네현의회와 가까이 있는 시마네현립 산업교류회관에서 HNS연구소(이사장 고마쓰 아키오) 주최로 독도와 난징대학살 등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필자는 ‘시마네현 고시와 죽도의 날의 불법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우익단체의 난동에 대비해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고, 시마네현 주민 100명과 우익단체 회원 일부가 참석했지만 심포지엄은 평온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 일본인 청중이 ‘독도는 한국 영토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마쓰에(松江)역에서 나눠준 자료집을 본 젊은이는 e메일을 통해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일본 외무성이 발행한 ‘독도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를 반박하는 나이토 세이추 교수의 영상물이 상영됐다. 올해는 시마네현과 돗토리현 주민으로 구성된 평화어필실행위원회가 죽도의 날을 평화의 날로 하자며 ‘대립의 세기에서 공생의 세기로’라는 평화선언을 했다. 이처럼 일부 활동가가 ‘독도는 한국 땅’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영향력은 극히 미비하다.




일본 시민사회단체가 독도문제를 역사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독도문제의 본질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영토문제로 보게 되면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가 중심에 서게 된다. 판단기준은 국가의 이익 여부에 따라 달라지고, 객관적·역사적 사실은 자국 중심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근원이 유일한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는 독도문제가 국가라는 정치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정치적 분쟁이 될 뿐이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국가를 떠나 객관적·역사적 사실을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한·일 시민사회단체는 ‘독도문제는 한·일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다. 객관적·역사적 사실의 문제이다’라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독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노력해야 한다. 독도문제는 역사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 독도수호대

2000년 3월1일 결성된 단체이다. 독도문제의 올바른 이해와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학술 조사연구와 자료집 발행, 강연회, 전시회, 해외 오류정보 시정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독도지리정보표준화 운동을 전개해 2005년 6월28일 정부합동고시를 이끌어냈다. 2000년부터 ‘독도의 날’(대한제국칙령 제정일 10월25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한 국회청원, 1000만명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2000년 8월 울릉도-독도 뗏목학술탐사 이후 입도허가제의 부당함을 밝히기 위해 독도탐방행사를 시작한 이후 해마다 이어가고 있다. 2004년, 최초로 독도 물골 수질검사를 실시해 부실한 관리정책을 개선했다. 전 세계에 잘못 알려진 독도와 동해정보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일본인을 위한 일본어 홈페이지 운영, 자료집 발행과 일본 현지 배포, 강연 및 전시 활동을 하는 한편 독도 관련 뉴스를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독도뉴스’ 개통을 앞두고 있다.

■ 글쓴이 김점구는



독도수호대 창립 당시 사무국장으로 출발해 현재 대표를 맡고 있다. 2004년부터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 사무차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학교, 단체, 공공기관의 독도 전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울릉도 재개척기와 일제강점기의 울릉도와 독도 역사에 관심을 갖고 증언채록과 자료수집,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울릉도내 부일협력자와 독도문제의 상관관계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