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1) 중국 해남도 ‘조선촌’이 증언하는 일제의 만행

ㆍ형무소서 끌려가 노예처럼 일하다 학살 ‘한 맺힌 유골들’


사토 쇼진 |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 회장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약 1000㎞ 떨어진 곳에 대만이 있다. 대만에서 서쪽으로 1000㎞ 정도 떨어진 곳에 해남도(海南島)가 있다. 해남도 남단, 중국 하이난성의 싼아(三亞)시 교외 여지구진(枝溝鎭)이란 곳에 ‘조선촌’(朝鮮村)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이 ‘조선촌’에는 지금 조선인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1943년 봄부터 일본정부·일본해군·조선총독부는 조선 각지의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사람들을 선발해 ‘조선보국대’에 편입시킨 뒤 해남도로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44년 말까지 ‘조선보국대’는 여덟 차례에 걸쳐 조직되고 약 2000명이 해남도에 강제연행됐다.




2008년 10월 ‘조선촌’ 조선인 희생자가 묻혀 있는 곳 인근에서 고속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뒤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작업사무소와 기숙사.





비행장 건설, 철광석 채광 등이 중단된 뒤 ‘조선보국대’ 사람들은 싼아시 교외의 여지구진남정촌(枝溝鎭南丁村)과 그 주변에서 군용도로 건설공사를 하고, 군용 동굴을 파거나 다른 군용시설 건설 등에 동원됐다. 45년 8월 일본 패전 전후까지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병사들에 의해 살해됐다. 일본군이 없어지고 나서야 남정촌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해당한 조선인을 애도하며 ‘조선촌’이라고 개명했다. 지금 ‘조선촌’ 중앙 광장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묻혀 있다.




일본기업은 일본점령하의 해남도에서 일본군과 함께 자원을 약탈하고 주민을 학대했으며, 조선이나 대만·중국 각지에서 연행해 온 사람들을 혹사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을 폭행사·사고사·병사·아사시켰다. 일본기업의 경제침략은 일본군의 군사침략과 결합됐다.




1926년 이후, 조선에서 대규모 수력발전소나 비료공장, 유지(油脂)공장, 화학공장, 화약제조공장, 콩 조미료제조공장 등을 경영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약탈했던 일본질소(日本窒素)는 40년 4월부터 해남도에 침입해 서부지역 석록(石碌)광산의 철광석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조선보국대’ 사람들은 일본군용비행장 건설, 항만 건설, 철도·철교 건설, 특공정격납용동굴(特攻艇格納用洞窟) 건설 등에 동원되고 석록광산이나 석원(石原)산업이 경영하는 전독(田獨)광산에서도 강제 노동했다. 전독광산에 세운 ‘전독만인갱사난광공(田獨萬人坑死難壙工)기념비’에는 ‘조선, 인도, 대만, 홍콩 및 해남도 각지에서 연행돼 온 노동자가 이곳에서 학대당하고 혹사당해서 죽임을 당함’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본내무성 문서, 조선총독부 문서, 구일본군 문서에 따르면, ‘조선보국대’에 편입된 후 해남도로 끌려 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은 1000명(또는 그 이상) 정도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해남도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98년 6월 ‘기주(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조선촌’을 방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98년 7월에는 한국의 KBS(한국방송공사)가 ‘조선촌’에서 유골의 일부를 발굴했다.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2002년 4월17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2003년 5월5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선촌’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인(死因)을 규명하고, ‘조선촌’ 유골의 처우를 국가프로젝트로 생각해 달라고 요청했다.




2004년 9월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일본정부(총리, 법무장관, 후생노동장관)에게 조선의 감옥에서 해남도로 연행된 조선인 전원의 명부를 포함한 조선보국대 관련 문서의 공개와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2004년 가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독립기념관에서는 ‘해남도에서 일본은 무엇을 했는가?-침략·학살·약탈·성노예화’ 특별전이 열렸다.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또 2005년 4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일제강점하의 해남도에서 조선인 강제동원·학살피해 진상규명을 공동으로 하자는 것과 이를 위해 ‘조선촌’ 발굴을 하자고 제안했다.




 
2001년 1월 ‘조선촌’에서 발굴된 조선인 유골. 머리에 큰 구멍이 나 있다.




98년 6월부터 2006년 4월까지 30차례 정도 ‘조선촌’을 방문했던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더 이상 방치해 두면 안된다고 판단해 어쩔 수 없이 2006년 5월, 독자적이자 처음으로 ‘조선촌’ 유골 발굴을 위해 과학적인 시도를 했다. 이 시도는 매장양식, 매장상태, 유체상태, 유골, 유물상태, 유물내용 등의 해석·감정·분석에 있었으며, ‘조선촌’에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밝히고, 공적 기관의 전면적 발굴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의 발굴은 중국 하이난성 정부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2008년 여름 ‘조선촌’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돼 한국인 유골이 묻혀 있는 장소 가까이에 있는 곳이 파헤치고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설공사용 건물 등이 건설되어 유골의 일부가 땅 위에 그대로 드러났으며, 햇빛과 빗물에 노출되기도 했다.




2008년 10월 중국 해남도 정부의 ‘조선촌’ 횡단 고속도로 건설로 파헤쳐져 드러난 유골.





‘조선촌’에 매장된 조선인은 이제 유골이 되어 일본의 침략범죄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유골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에는 흙덩이와 함께 영원히 방기될 것이다.




1939년 2월10일,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해남도에 일본군이 기습 상륙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대만 식민지화, 조선 식민지화, 만주 식민지화 당시와 마찬가지로 해남도 침략 때에도 일본정부의 점령지 확대를 기뻐하며 군사행동을 지지했다.




일본정부·일본군·일본기업은 해남도에서도 민중을 학살하고, 집을 태우며 가축이나 물건, 경작지를 포함한 토지를 수탈했다. 광산자원, 수산자원, 삼림자원 등 각종 자원도 수탈했다. 자원 약탈·군용시설 건설(비행장, 항만, 도로, 철도) 등을 위해 해남도 민중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해남도의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다. 해남도의 자연을 파괴하고 일장기·기미가요·일본어를 해남도 민중에게 강요했다. 군표를 남발했으며, 아편재배도 시작했다. 일본군 문서와 일본기업 문서에 따르면 1939년 2월부터 45년 8월까지 6년 반 사이에 해남도에서 일본군·일본기업이 살해한 아시아 민중은 7만명을 넘는다.




일본의 해남도 침략시대는 해남도 민중의 항일반일투쟁의 시대였다. 일본 민중이 해남도 침략을 왜 막지 못했는지, 조선식민지화를 왜 방지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지금 시오니스트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세계의 민중이 외면하고 있는 문제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일본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해남도에서 일본의 국가범죄를 총체적이고 상세히 밝혀냄과 동시에 아시아 민중의 항일·반일투쟁의 역사를 배우면서, 국민국가 형성기 이후의 일본국가의 침략 책임을 추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앞으로도 일본이 타 지역과 다른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바뀐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조를 바꿔나가는 운동을 계속해나가고 싶을 뿐이다.


 


■ 기주(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기주(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하 기진모)은 1989년 6월 미에현 기모토(三重縣 木本)에서 일제강점기에 학살당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배상도)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 기초가 됐다. 97년 2월 설립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기진모는 98년부터 해남도에서 ‘조선보국대’의 진상규명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기진모는 2004년 9월15일 일본정부에 “조선보국대의 대원으로서 일본점령 하의 해남도에 송환되어 강제노동 당한 조선인 전원의 명부 소재 및 해남도로 끌려온 시기와 그 후의 소식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진모는 2004년 10월6일자로 후생노동성으로부터 “조선보국대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요청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는 회답을 받을 뿐이다. 이후에도 일본정부는 ‘조선촌 학살’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 ‘조선촌 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조선촌’에 묻혀있는 조선인 유골의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기진모가 2006년 5월 독자적으로 시도한 발굴작업은 하이난성 정부에 의해 금지 당했으며, 민간인 조직의 ‘조선촌’ 유해발굴도 불가능하게 됐다. 한국 정부나 특정기관이 ‘조선촌’에 묻혀 있는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지 않으면 일본정부는 조선보국대 학살의 사실을 끝까지 숨길 것이다. 기진모는 2007년 8월 창립된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와 함께 앞으로 현지조사와 구술청취 활동, 보고서 작성,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해남도에서 일어난 일본의 침략범죄 사실을 밝혀나갈 계획이다.



■ 글쓴이 사토 쇼진은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미에현(三重縣) 기모토(木本)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노동자(이기윤·배상도)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 미국항공모함에 반대하는 시민의 모임, 기주(紀州)탄광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869년 국민국가 일본이 식민지화해서 홋카이도(北海道)라고 이름 붙인 땅인 아이누 모시리에서 식민1세 아버지와 식민2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