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3)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70년 망향의 한’

ㆍ‘동토의 땅’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해방뒤엔 ‘잊혀진 존재’로

배덕호 | 지구촌동포연대 대표


이장호 감독, 김지미 주연의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는 일제 식민시기 조선인 ‘명자’가 ‘아끼꼬’ ‘쏘냐’로 불리며 세 나라 국적을 가진 채 기구하게 살다가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머나먼 남사할린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는 게 줄거리다. 영화 주인공처럼 1905년부터 45년까지 당시 일본 땅이었던 남사할린(당시 일본명 가라후토) 전역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망향의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도는 수만명의 조선인 혼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사할린 돌린스크시 탄광마을 브이코프촌 조선학교 졸업사진. 해방 이후 남사할린 전역에서 운영되던 조선학교는 1963년 소련 행정당국의 폐쇄 결정으로 문을 닫게 되고, 이로부터 25년간 민족의 말과 글 교육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 지구촌동포연대 제공




남사할린은 일제 식민시기 조선인 7만여명이 집단으로 끌려가 극심한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해방 후에도 부모형제를 그리다 한 많은 삶을 마감해야만 했던 곳이다. 38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조선인의 집단 강제동원이 시작되고 이들은 대부분 탄광이나 벌목장, 비행장·도로·철도 등 군수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된다. 모집이나 알선으로 먼저 갔던 이들도 ‘국가총동원령’ 이후에는 현지에서 징용되어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강제노동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44년 8월에 이르러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전쟁물자 수송이 어려워지자, 일본은 각의 결정에 따라 조선인들을 일본 본토로 재징용한다. 이른바 ‘전환 배치’ 혹은 ‘이중징용’이다.


이때 ‘이중징용’된 조선인은 최소 3000명에서 많게는 2만명에 이른다. ‘이중징용’ 이후 일본 본토와 남사할린 가족 간의 연락은 두절되고 만다.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은 이산의 아픔과 더불어 가장을 잃고 난 후의 생활고, 민족적 차별과 결손가정이라는 사회적 차별, 가정 해체로 인한 후유증 등 정신·물질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구소련의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은 나치 독일을 물리친 5월9일이고, 러시아 사할린주의 종전기념일은 9월2일이다. 45년 8월9일부터 남사할린 전역에서는 구소련과 일본 사이에 한달간의 치열한 전투가 지속된다. 이 기간 동안 남사할린 전역에서 일본 민간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포자르스코예(미즈호) 조선인 27인 학살사건’과 ‘레오니도보(가미시스카) 조선인 18인 학살사건’을 제외하고는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45년 종전 이후 남사할린에는 고향땅으로 돌아갈 배편을 기다리며 남았던 조선인이 약 4만3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46년 12월9일 체결된 ‘소련지구송환미소협정’에 따라 귀환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일본 호적을 기준으로 일본인만 받아들였고, 당시 조선 호적으로 편제된 조선인들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46년 12월5일부터 49년 7월22일까지 총 29만2590명의 일본인만 일본 땅으로 귀환한다. 56년 10월19일 구소련과 일본은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57년 8월1일부터 59년 9월28일까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그 가족의 귀환도 이루어져 1541명의 조선인만 일본으로 송환된다. 결국 종전 이후 90년 한·소 수교에 이르기까지 45년간 4만여명의 강제동원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사할린에 방치되어 세상과 대중의 기억에서조차 점차 멀어져갔다.


남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에는 조각배 모양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이 언덕은 종전 직후 남사할린 전역의 조선인들이 어린아이와 봇짐을 등에 지고 수백㎞를 걸어 내려와 이제나저제나 배편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곳이다. 대부분 남한이 고향인 조선인들은 고향땅도 밟지 못한 채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추위에 얼어 죽고, 굶주려 죽고, 고향땅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다 죽어간다. 강제동원된 지 70여년.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나면 이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할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말 게다. 현재 사할린섬에는 잔류 한인 1세 630여명을 포함해 후손 3만여명이 살고 있다.


58년 일본인 처와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 박노학씨는 사할린 한인 동지들의 조국 귀환문제를 일본 사회에 호소한다. 그 뒤 75년 다카키 겐이치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소송’이란 법적 공방이 시작된다. ‘15년 재판’으로 명명된 이 소송은 취지가 개선된 점을 들어 89년 1심 판결도 없이 종결된다. 90년 8월28일, 최초의 ‘전후보상재판’으로 불린 ‘사할린 잔류한인 보상청구소송’이 진행되지만 원고 21명으로 구성된 이 소송 또한 94년 취하한다. 당시 일본 정부가 사할린 한인 관련 ‘50주년에 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어 재판 결과가 부정적일 경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원고 측에 소송 취소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50주년 파일럿 프로젝트’라는 당시 일본의 지원책에는 영주 귀국자와 사할린 잔류자에 대한 지원, 사망자 유골 송환 등 포괄적인 내용이 있었다는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으나 문서로 공식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세 번째로 2007년 9월25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우편저금 등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우편저금에 관한 일본 우정성의 조사(97년 3월 현재 59만계좌, 액면가 1억8000만엔)를 근거로, 강제 적립된 우편저금과 간이보험 등에 대한 소송을 통해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사할린한인기금’을 설치해 사할린 잔류 1세와 후손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형제서약서’. 귀향길이 막힌 조선인들은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해 서로 ‘형제임’을 맹세하고 서약서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사업에 총 700억여원을 지원했다. 2000년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 건물 건립비 32억엔, 2005년 ‘사할린한인문화센터’ 건설비 6억엔, 일시모국방문사업비, 2007년 재개된 영주귀국사업 항공료, 정착 관련 일회성 물품 및 생필품 지원비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수만명에 대한 법적 배상책임과 전후 방치책임을 애써 외면한 채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표정이다.


90년 한·소 수교 이래 한국 정부의 대응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수교 당시 최소한 수만명의 운명이 걸린 ‘사할린 한인 관련 법적지위협정’ 체결은 외면한 채 일본 정부가 제시한 대로 한·일 양국 적십자사를 사업주체로 하는 반쪽짜리 ‘영주귀국사업’ 수용이 정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 차원의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안’ 논의 과정에서도 과연 모국 정부인지를 의심케 하는 발언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사할린동포 2~3세대의 국적 이탈을 조장할 수 있는 등 러시아와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 사할린 한인 1세(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인 기존 영주귀국자와의 형평성,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일본 정부와의 지원 중복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2000년 안산 사할린 ‘고향마을’을 비롯해 지난 3월 말까지 한국의 19개 지역으로 3762명의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귀국’했으나, 이들은 직계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는 영주귀국 조건에 의해 또다시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2인 1세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낯선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한 집에서 살아야만 했다.


앞으로 할 일도 수없이 많다. 우선 사할린 잔류 한인에 대해 영주 귀국한 한인 지원에 준하는 지원책 등 한국 정부의 책무를 규정한 ‘사할린 한인 지원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남사할린 전역의 한인 실태에 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실태조사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소실되어 가는 사할린 한인들의 강제동원 70여년 역사와 한인문화를 기억하고 보존할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을 시급히 현지에 건립해야 한다. 또한 사할린 잔류자에 대해 한·러 양국의 협의 아래 20만 해외입양인처럼 하루속히 이중국적을 부여해 이들이 고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인도적인 ‘위로금’ 지급 등 지원책에서 사할린 현지 한인 유족들이 소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분명한 원칙을 정해 일본 정부의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과 전후 방치 책임, 강제 우편저금 반환 등은 물론 피해자와 유가족, 그 후손들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전후 방치 책임에 대한 유엔 차원의 현장 실태조사가 긴요하다.


남사할린 전역에서 삶을 마감한 수만명의 한인 1세 유골 문제(실태조사, 현지 위령시설 건립, 유골 반환문제 등)도 한·러·일 세 나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 지구촌동포연대


1999년 2월 설립된 지구촌동포연대(KIN)는 남북 재외동포사회 간 교류협력, 재외동포 권익 증진, 한반도 평화통일 등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정부 수립 이전 국외로 이주한 실질적인 해외동포를 배제시킨 ‘재외동포법’ 개정 캠페인을 벌인 끝에 2004년 2월 구소련, 중국 등의 300여만 동포들이 국내 출입국과 체류 때 혜택을 보게 됐다. 2005년 강제퇴거 위기에 처한 일본 ‘우토로 조선인마을’을 살리기 위한 ‘우토로국제대책회의’를 결성하고 ‘우토로역사기념관’ 건립 지원활동도 벌이고 있다. 또 ‘에다가와조선학교문제대책회의’ ‘에다가와조선학교지원모금운동’과 더불어 ‘120만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존재를 국내에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09년 ‘사할린희망캠페인단’을 만들어 일제 때 강제동원된 러시아 사할린 한인의 삶과 역사를 복원하는 캠페인을 전개 중이다. 이 밖에 독립국가연합(CIS) 지역동포, 중국동포,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의 국내 자유왕래운동을 벌이는 한편 2004년부터 ‘재외동포NGO대회’를 해마다 열고 있다. 누리집
www.kin.or.kr / (02)706-5880



▲ 글쓴이 배덕호는



지구촌동포연대(KIN) 창립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재외동포법 개정을 위한 재외동포연대추진위원회 사무국장, 재외동포불법체류사면청원운동본부 사무국장, 재외동포NGO대회 1~6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사무국장과 사할린희망캠페인단 운영위원장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