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4)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기나긴 보상투쟁

ㆍ“피폭자는 한·일 어디에 있건 피폭자” 30년 소송 끝 승리

곽귀훈 | 전 원폭피해자협회 회장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10일 전인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과 3일 뒤인 8월9일 오전 11시2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는 사이판 근처의 테니안 섬을 출발한 미군 장거리 폭격기 B29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풍비박산해버리고 말았다.


원자폭탄은 인류가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괴력을 발휘했다. 1초의 몇 만분의 1인 짧은 순간에 섭씨 4000도가 넘는 열선과 각종 방사선, 경이적인 풍압으로 사람과 모든 시설물은 먼지가 되어 암흑세계를 연출했다. 그 뒤 두 도시에선 흰 버섯구름만 피어오르는 광경이 멀리서 바라다보였을 뿐이다.




원자폭탄의 폭발 이후 일본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였던 히로시마는 구부러진 금속들과 벽돌 파편만이 나뒹구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당시 두 도시에 한국인이 몇 명이나 살고 있었고, 그중 몇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전해인 44년 말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통계로는 히로시마현에 8만1863명, 나가사키현에 5만9573명 등 모두 14만1436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두 도시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보면 히로시마시에 5만여명, 나가사키시에 2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가 히로시마에서 3만여명이 죽고, 나가사키에서는 1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은 3만명 가운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2만3000명 정도이고, 나머지 7000명은 일본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귀국한 사람 중 2000명 정도는 북한으로 갔을 것이란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이 같은 숫자는 일본 전체 피폭자 68만명의 10%가 넘는다. 히로시마시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경남 합천군 출신이 약 8할을 차지하는 특징을 보였으며, 나가사키시의 경우 전국 각지에서 강제 연행되어 온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활고로 건너오거나 징용으로 연행된 사람들은 일본 현지에서 사람 대우를 받은 일이 별로 없었으니 피폭 후라고 그런 상황은 개선될 리가 없었다. 전쟁 도중 피난 갈 곳이 없어 하천부지나 차별촌 산기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어서 피해도 훨씬 심했다. 방사선 잔류가 극심한 곳에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살아야 했으니 피해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차별의식이 강한 구호소에서 치료를 받다가도 한국인이란 사실이 드러나면 의사가 치료를 중단했다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히로시마 출신 일본인 화백 마루키 이리와 마루키 도시 내외가 피폭 한국인의 시체를 까마귀가 쪼아 먹는 그림을 그려 유명해졌을까. 그 그림은 수년 전 서울 인사동에서도 전시돼 한국인에게도 낯익다.


그런 수모를 겪다가 귀국한 피해자들이었지만, 살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농사지을 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한 몰골이라고 접근을 꺼리는 친척들도 많아 사람을 피해 산속에서 화전을 일궈 초근목피 하듯 한 맺힌 삶을 그저 이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현재 2600여명인 생존 원폭피해자는 피폭 직후 생존한 사람의 10%에 불과하다. 일본인의 경우 생존자가 40%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인 피폭자가 얼마나 가시밭길을 걸어왔는지 짐작하고 남는다.


이런 참상임에도 한국 정부는 14년간이나 끌어 온 한·일회담에서 일언반구 피폭자 문제를 언급한 사실이 없다. 일본 정부는 그 뒤 모든 문제는 한·일협정으로 청산이 끝났다고 발뺌을 하고 있었다.


1970년 부산에 사는 일본 태생 피폭자인 손진두씨가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다. 그가 “원폭피해자여서 원폭증을 치료하기 위해 왔으니 원폭수첩을 교부해 달라”고 요구하자 일본 정부는 “밀항해 온 범법자인 데다 국적이 다르니 수첩을 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법원에 제소해 74년 3월에 승소했다. 그해 7월22일 필자가 도쿄도(東京都)에 수첩을 신청하자 같은 날 일본 정부가 후생성 국장 명의로 ‘이 수첩은 국외로 나가면 효력이 정지된다’라는 이른바 ‘통달 402호’를 내려 법원결정을 무효화했다.


그후 78년 최고재판소에서의 승소에도 불구하고 ‘통달 402호’가 우선하는 무법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무원호(無援護)가 4반세기나 지속되던 98년 5월 필자는 오사카의 한 병원에 입원 가료 중 원폭수첩을 교부받았다. 이어 수당도 받은 뒤 퇴원해 귀국하면서 오사카부에 “수당을 한국의 내 은행계좌에 입금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신은 출국했으니 피폭자 자격을 상실했다”고 통고해왔다. 이 때문에 그해 10월 일본 정부와 오사카부 지사를 상대로 피폭자자격확인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재판 도중 시종일관 “한국에 있으면 피폭자가 아니고, 오전에 일본으로 입국하면 피폭자가 되고, 재판이 끝나고 오후에 공항을 나서면 피폭자가 아니다. 무슨 법이 아침과 낮, 석양에 변하느냐”고 항변했다. 뿐만 아니라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라는 원칙을 세워 법정에서는 물론 언론이나 정계, 사회단체에 유포하며 사력을 다해 투쟁했다. 그런 활동이 유효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패할 것이란 예상에도 불구하고 2000년 6월에 지법에서 승리해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공소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공소심에서도 2002년 12월5일 승소, 일본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원들이 오랜 투쟁 끝에 2003년 3월 최초로 수당을 지급받는 뜻깊은 날, 외환은행 본점에서 통장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고법 승소 후 상고를 단념하겠다고 피고인 오사카부 지사가 맨 처음에 나섰다. 오사카시의회 공명당 의원들이 상고 단념을 결의하자 곧이어 여당인 공명당 전국의원총회에서 결의했다. 중의원 후생노동위에서 질의한 8명 가운데 6명이 상고를 포기하라고 물고 늘어지는가 하면 참의원에서도 그 기세가 이어졌다. 여당인 자민당 실세 전략실 총장이 나서 필자에게 상고 포기를 약속하는가 하면 다음날 여3당 간사장들이 회의를 열어 상고 포기를 최종 결의했다. 그 결과를 정부에 전달하는 것으로 피폭자의 사활이 걸린 투쟁은 일단 끝이 났다.


일본 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과의 재판에서 완패했다. 그 결과 재외피폭자들에게 매월 수당과 의료비를 지급해야 하며, 사망 시에는 장례비까지 지급하게 됐다. 2003년 3월부터 ‘통달 402호’는 폐기되고, 그동안 불법으로 정지되고 시효 등으로 밀렸던 모든 수당도 모두 소급해서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통달 402호’로 인한 피해보상재판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모든 문제를 재판으로 해결해야만 했기에 실로 엄청난 34차례의 재판을 진행해 왔다. 그런 노력 덕분에 절반 이상이 우리 측의 승리로 끝났으니 역사상 드문 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동안 우리를 후원해 준 일본의 지원 단체 덕도 크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도 적지 않다. 의료비에 상한선이 있고, 원폭수첩이 없는 피폭자가 150명에 이르며, 의료특별수당 해당자도 더 발굴되어야 한다.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인을 강제 연행해 피폭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40년 동안이나 방치한 책임을 물어야 하고 보상받아야 한다. 우리는 핵이 없는 세상도 만들어야 한다. 미국은 히로시마형의 1000배에 이르는 수소폭탄을 비키니 섬에서 실험했고, 러시아는 노바야젬리야 섬에서 히로시마형의 4000배나 되는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핵무기가 지구상에는 2만5000여개나 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지구상의 어떤 생물도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하나 북한으로 간 2000명의 피폭자도 당연히 보상과 원호를 받아야 한다. 대부분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1959년에 시작한 북송사업으로 귀국한 사람 가운데 피폭자가 382명이라는 발표가 얼마 전에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일본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원호를 받은 게 없다.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 한국원폭피해자협회


1967년 7월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로 발족했다. 71년 9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68년 8월6일 처음으로 원폭피해자 위령제를 조계사에서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같은 날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을 택한 것이다. 협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고 서울·부산·합천·대구·창원·평택·익산 등에 7개 지부를 설치했다. 등록자 2632명 가운데 원호수첩 소지자는 2482명이며, 미소지자가 150명이다. 미소지자는 증인이 없어 피폭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원호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현재 피폭자 특별지원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심의 중이다.



▲ 글쓴이 곽귀훈은



1967년부터 피폭자 운동에 참여해 원폭피해자협회 부회장, 회장,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일 투쟁의 선봉에 서 왔다. 반핵평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일제 징병 간부후보생 훈련 도중 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서 피폭됐다. 전주사범학교 5학년 때인 44년 9월 징병 1기생으로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에 강제 입대했다. 45년 말부터 교육계에서 일하며 동국대사범대부속중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98년 10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이른바 ‘곽귀훈 재판(재외피폭자 자격확인 소송)’에서 승리해 일본 국외 피폭자들에게도 원호법을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과 동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