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6) 부끄러운 역사 친일 ‘미완의 청산’

ㆍ친일파 죗값 치르긴커녕 기득권 대물림 ‘끝나지 않은 국치’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올해는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 노예로 전락했던 경술국치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데에는 무엇보다 일제의 침략야욕에 일차 책임이 있지만 우리 내부에도 여기에 적극 가담한 친일매국세력이 있었다는 부끄러운 역사를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얼빠진 부류를 제외하고 누구나 친일파를 비난하지만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청산되었는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오른쪽)과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의 얼굴이 함께 나온 기념엽서.




친일파란 일본의 이익과 요구에 따라 적극 협력한 무리를 일컫는다. 일본의 이익과 요구는 시기마다 다르게 등장했고
그 때마다 친일파들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1910년 이전 일제의 근본 요구는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라는 것이었고, 여기에 조응한 무리들이 이완용과 같은 ‘매국행위에 가담한 무리’였다. 이들이 곧 ‘매국형 친일파’다. 이른바 을사오적(1905년), 정미칠적(1907년), 경술구적(1910년)과 같이 매국조약에 가담한 대신들이나 한일합방청원운동을 전개하고 의병을 무력 탄압했던 일진회 간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완용은 자신을 친일매국노로 부르는 것에 대해, 당시 국제정세를 보아 대한제국은 어차피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부질없이 저항운동을 하다 헛된 생명들만 희생되느니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희생을 구하고자 합병조약 체결에 나섰다고 강변했다. 정말 그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기에 나라를 넘겼을까? 거짓말은 바로 드러난다. 이완용은 망국 후 병합기념 은사금으로 20만원(약 40억원)을 받았다. 원금을 은행에 예치하고 연 5%의 이자를 받았으니 1년에 한번씩 2억원의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해마다 2억원의 로또복권에 당첨된다고 상상해보라! 또 그는 조선 귀족이 되어 백작을 수여받았으며, 조선총독의 최고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나라가 망해 모두가 노예 신세로 전락했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불과 70여명의 매국형 친일파들은 오히려 부와 권력과 명예를 통째로 거머쥐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신의 부귀영달만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것이다.


1910년 8월 이후에는 나라가 없어졌기 때문에 매국형 친일파를 대신해 새로운 유형의 친일파, 곧 ‘직업형 친일파’가 등장했다. 일제는 조선을 악착같이 수탈하는 것을 ‘통치의 효율화’라고, 조선인의 반항을 무력으로 짓밟고 영구히 지배하는 것을 ‘통치의 안정화’라고 내세웠다. 제2세대 직업형 친일파란 바로 일제 식민통치의 ‘효율화와 안정화’에 적극 협력한 무리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일제 수하의 조선인 고위공무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소속된 고등관(지금의 사무관에 해당) 이상의 관료인 군수, 판·검사 등과 경부 이상의 경찰 간부와 위관급 이상의 군 장교 등이 매국형 친일파의 뒤를 이었다. 이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일본은 한반도 전체를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조선인 관리가 최상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는 대체로 고등관인 군수였다. 종7위 고등관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렵다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능력은 물론 일제에 대한 자발적 충성이 뒤따라야만 임용이 되었다. 고등관이 되기만 하면 그 아래인 ‘판임관 관료’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일거에 보장되었다. 고등관과 판임관의 구별은 매우 엄격해 고등관은 ‘사족’ 취급을 받았고, 판임관은 일반 평민과 신분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고등관은 기차를 타더라도 3등칸이 아니라 2등칸 이상을 탔으며, 고등관의 부인은 ‘옥상’이란 일본 칭호가 붙었고, 판임관의 부인은 ‘오카미상’으로 불렸다. 한마디로 특권층이었다. 군수를 포함한 조선인 고등관이야말로 지위나 직무상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핵심적으로 가담한 부류였으며, 이들의 협력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는 불가능했다.


일본 또는 그 괴뢰국인 만주국의 소위 이상도 친일파의 핵심이었다. 일제나 만주국의 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면 자동적으로 고등관이 되었다. 조선인이 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친 조선인 소위 임관자는 63명이다. 1년에 채 두명이 되지 않았다. 만주국 시기(1932~1945년) 만주군관학교 출신 조선인 소위 임관자는 67명 내외로 연평균 5명 미만이었다. 이들 조선인 장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독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 적국 장교로서 가장 악질적인 반역행위자들이었다. 하물며 당시로는 선망의 대상인 교사직도 내팽개치고 혈서까지 써서 일본군 예비역 장교이자 만주군 소위로 복무한 경우 어찌 그 죄가 가볍다 하겠는가.






일제 말 새로운 DNA를 가진 친일파, 이른바 ‘황국신민형’ 또는 ‘전쟁협력형 친일파’들이 나타났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이래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말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 시기 일제는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조선인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총동원했다. 조선인이 일왕(천황)과 일본을 위해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치고 나아가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세뇌공작이 필요했다. 이러한 대규모 이데올로기 세뇌공작과 전쟁 동원을 위해 일제는 조선인 명망가,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교육자 등을 앞세웠다. 이들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내선일체) 또는 ‘우리는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자식이다’(황국신민)라며 민족말살에 앞서는 한편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국방헌납을 강요하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며 제국의 나팔수가 되었다. 시인 서정주는 ‘마쓰이 히데오 송가’라는 시를 써 조선인 가미가제 청년의 자살공격을 미화하고 야스쿠니 용사로 찬양했다. 어떤 친일 여성은 “시어머니에게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연탄집게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고 광분했다. 이들은 민족반역자일 뿐 아니라 아시아 민중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동했다는 점에서 전쟁범죄자이기도 했다.


이들 지식인은 훗날 ‘일본을 찬양하고 전쟁에 나가라는 글을 쓰거나 연설은 했을지언정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거나 미미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고대 이솝우화에 이들을 향해 질타하는 내용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승전국의 왕에게 포로로 잡힌 나팔수가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저는 당신의 군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기도 없고 이 나팔뿐이랍니다.” 그러자 왕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정녕 네 목숨을 앗아야겠다. 나팔을 불어 우리를 공격하도록 독려한 놈이 바로 너였구나!” 일제의 민족말살과 침략전쟁의 나팔수들이 바로 친일 지식인, 언론인, 문화예술인, 종교인들이었다. 조선인의 정신마저 마비시켜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몬 죄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친일파들은 마땅히 그 죗값에 따라 처벌을 받은 후 새로 건국된 나라에서 새 삶을 사는 기회를 제공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승만과 미군정,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한국민주당이 야합해 친일파를 중용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세웠다. 그 결과 제1공화국은 친일공화국으로 출범했다. 그 후 친일세력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를 장악했고, 학연·지연·혈연 등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그 기득권을 이어오고 있다.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빈곤을 대물림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는 대한민국만의 속담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독립운동가 영령을 모신 국립현충원에는 40명 가까운 친일파들이 국가유공자로 버젓이 안치되어 기려지고 있다. 지방 곳곳에서는 각종 친일파 기념사업이 시민의 세금으로 추진되고 있다. 세금으로 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들어서서 어린 세대들에게 이들을 민족 지도자로서 존경하는 인물로 가르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범죄의 재구성 아니겠는가!


아직도 친일 파시스트인 이광수를 양심수라고 불러야 한다는 얼빠진 주장이 나오고, 일제의 식민통치 덕택에 해방 후 남한이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신식민사관이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는 나라.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자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를 주류 언론이 빨갱이조직이라고 매도하고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상한 나라가 여기 있다. 친일청산에 앞장섰다는 게 일부 권력층과 보수 세력에 의해 죄과가 되어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이 주홍글씨로 낙인찍히는 나라. 어쩌면 친일청산이라는 제2의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안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100년 전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 국치인 것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1991년 2월 친일연구가인 임종국씨의 뜻을 계승하는 시민들과 학계가 참가해 ‘반민족문제연구소’로 출범했다.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고쳤다. 한국 근현대사, 특히 한·일 관계의 현안 해결을 위해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고 있다. 특히 국내 유일의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으로서 6000여 회원들을 기반으로 국내와 해외에 23개 지부 또는 지회를 두고 일제잔재청산 시민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고 있다. 199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교수 1만인 서명운동을 펼쳐 2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2001년 150여명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한 후 자발적인 시민 성금과 회원 회비를 바탕으로 2009년 11월 수록인원 4389명, 전 3권 2000여쪽에 이르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 글쓴이 박한용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국치100년을 맞아 시민단체와 학술단체 등이 공동으로 만든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 겸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한국실행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