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12) 돌아오지 못하는 일제 민간징용자 유골

ㆍ日정부 ‘인간 존엄성’ 인식 부족이 ‘유골봉환’ 최대 걸림돌

고바야시 히사토무 |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


일제 강제동원희생자 유골 봉환의 어려움은 다른 역사문제와 과거청산이 그렇듯이 일본 사회가 여전히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유족에게 봉환되지 않은 유골의 대부분은 지시마(千島)열도, 사할린(樺太), 남양(南洋)군도, 중국 등 일본 본토 밖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것이다. 일본 국내에 남겨진 유골은 탄광·토목현장 등에 매몰된 채로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찰 등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나 기업 어디에서도 1965년 한일회담 이후 반환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미쓰비시 여성 근로정신대원들이 기숙사에서 출근하고 있다.




한·일 두 나라 정부의 유골봉환 노력은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의 표현에 따르면 전시 조선반도 출신의 민간 징용자 유골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이 그 존재의 확인과 유골봉환을 희망했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뜻으로 응답했다. 당시 다무라(町村) 외상은 “징용자의 유골문제, 봉환에 관해서는 현재 상당수의 기업에 대해 실시 중인 민간징용자 유골조사를 여름까지 완료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조속하게 한·일 간에 협의하고 전 군인·군속의 유골봉환을 포함해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인 전 군인·군속의 일본 국내 유골봉환은 일단 끝냈지만, 민간징용자(전시 강제동원노동희생자)의 유골은 그 뒤 한 구도 일본 정부에서 봉환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2005년 일본에서 사망한 한국인의 유골조사를 시작하는 한편 관계기업 600개사 가운데 현존하는 125개사에 정보제공을 요청했다. 그 중 5개사, 1개 단체에서 147구의 유골정보가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모르겠다” “자료가 없다” “별개의 회사다”라는 등 무책임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 뒤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에서 1511구, 불교교단의 정보를 합하면 2643구의 유골 정보가 일본 정부에 입수됐다. 일본 전역을 6개 권역으로 나눠 납골당과 사찰 등을 조사한 결과다. 일본 정부는 그 중 755구의 현장조사를 시행하고 558구의 보완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현장조사된 755구 가운데 25구에 대한 유가족을 한국 정부가 찾고 있지만, 당시의 다무라 외상이 언급한 ‘여름까지 조사 완료’는 고사하고 5년이 지난 지금도 유골봉환의 목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게 실상이다. 그 원인은 ‘한국인 군인·군속과 달리 한국인 민간징용자에 관해서는 정부와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고, 민간기업이 실시한 것으로 정부에는 책임이 없다. 정부는 인도적 입장에서 협력하고 있다’는 일본 정부의 자세에 있다. 일본 정부가 유골봉환문제에 관해 유족에게 그 책임을 인정, 사죄하고 추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골이란 그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인생을 보냈는지, 어떻게 죽었는가를 상징하는 인격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점령 아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고자 일본으로 넘어 왔다. 또 전시에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노무동원계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강제 동원돼 왔다. 그러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일본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을, 그 사람의 역사를 일본 정부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유골문제의 핵심이 있다.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전시 강제동원을 감행한 것은 일본의 국가권력 그 자체다. 조선인의 토지를 강탈하고 먹을 것을 빼앗은 실행자는 조선총독부였다. 조선반도에서 강제동원을 승인하고 명령해 실행시킨 것도 조선총독부였다. 일왕(천황)의 명령으로 일본제국군의 대장이 그 직책에 취임한 조선총독 아래 구성된 ‘천황’ 직속기관이 조선총독부였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의 ‘천황’의 군정(軍政)이었다. 조선인의 강제동원도, 그 죽음도 ‘천황’의 이름으로 실시된 것이다.


그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이 명확함에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자세야말로 유골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핵심이다. 일본 정부의 자세는 정권이 바뀐 오늘날에도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반영해 강제동원자에게 일을 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일본 기업도 여전히 자기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유골문제 해결의 장애가 여기에 있다.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들.




일본 정부가 유골문제에 제대로 대응해 오지 않은 것은 조선인의 유골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자국민의 유골에 관해서도 전후 65년 동안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일본인에 대해서도 전몰자의 혼령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지만 유골은 방치된 경우가 많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일본인 310만명 중 해외에서 사망한 사람은 240만명이라고 한다(‘이라고 한다’의 의미는 그 중에 조선인, 대만인도 포함돼 있으며 이는 일본 정부가 전시의 일본인 사망자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외전몰자 116만명의 유골 수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수습된 유골의 대부분은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모셔져 있지만 이 가운데 조선인, 대만인도 포함되어 있고 일본인 전몰자의 유골도 있다.


원래 천황제국가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민(民)의 죽음은 충성만이 존중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서 모셔지고 그 개인의 유해 대부분은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아직 그런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에 보고된 2643구의 조선인 유골 현황은 다양하다. 그 절반은 다른 사람들의 유골과 섞여 봉환된 것이어서 개별성을 잃어버렸다. 개별성은 있어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숫자는 극소수다. 남겨진 유골의 현황은 삿포로별원(札幌別院)의 유골과 같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이나 중국인, 일본인 등의 강제노동희생자 101명의 유골이 섞여 있는 것도 있다. 홋카이도, 사루후쓰촌, 아사지노 비행장에서 발굴된 유골처럼 신원확인에 DNA 감식이 필요한 것도 있다.


우리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 그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에 진력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유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응답하는 것에 힘써왔다.


2008년 시민의 손으로 한국의 유족에게 봉환된 무로란(室蘭)의 유골은 그 부친 구성조씨가 징용당한 아들의 유골을 찾아 1963년 당시 이케다 하야토 총리 앞으로 유골조사와 봉환요구 서한을 보내 외무성이 무로란에 유골이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한일회담을 거쳐 유골 봉환의 뜻을 답신했음에도 봉환되지 않은 채 무로란의 사찰에 안치되어 있다.


또 올해 삿포로별원을 방문한 다른 유족 진상윤씨는 1993년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사망지역의 구청에 편지는 보냈지만, 유골의 소재는 모른 채 시간이 흘러 삿포로별원에서 통지가 도착한 때에는 이미 개별성을 잃고 합장된 상태였다. 삿포로별원이 유골을 보관했던 지자키공업(地崎工業)의 요청에 따라 무연고 유골이라는 이유로 혼합해버렸다는 게 1997년의 일이었다. 진상윤씨는 ‘무념의 눈물’을 억지로 참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일본 정부와 관계 기업이 책임 있게 사망자를 조사하고 그 유골의 행방을 찾아 유족에게 설명·사죄할 것을 일본 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 시민들이 피해자 유족들과 만나면서 정부의 행위로 인해 일어난 이 같은 참상이 재발되지 않도록 비극적인 역사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자 한다. 우리는 한국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오는 10월 그 유족들을 일본에 초청해 증언집회와 대정부교섭을 기획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내야만 하며, 그것이 더 좋은 일본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문제에도 눈을 돌려 피해자들과 함께 문제해결을 위해 일본 시민들에게 연대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보내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강제동원진상규명전국네트워크


일제 패망 60주년을 맞고 한국에서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결성된 것을 계기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를 후원하던 일본 시민들이 2005년 7월 조직했다. 한국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와 제휴해 강제동원에 관한 자료의 수집·연구, 일본 정부와 공공기관 및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공개와 일본 정부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 전국에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한국의 피해자 단체와 연대하고 있다.



▲ 글쓴이 고바야시는



지난 5월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후쿠도메 노리아키가 급서한 후 강제동원진상규명전국네트워크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참가했으며, 30년간 조선인 강제동원 가해에 대한 조사와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호세이(法政)대학을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