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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의 ‘편파해설’ 얼마 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봤다.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의 경기를 중계하던 이상화 해설위원의 모습이다. 화면을 보지 않았다면 한국 선수 경기로 오해할 뻔했다. 이상화는 시종 편파적으로(?) 고다이라를 응원하다 뒤처지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안타까워했다. 고다이라 선수의 격차가 벌어지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표정과 눈물에 가득 찬 진심은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에 대한 우정일 수도, 또는 벌써 만 36세가 된 스케이터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겠다. 친구의 눈물어린 ‘편파해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 직후 한국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고다이라는 “Where’s 상화?”라고 하더니 한국말로 “상화, 잘 있었어? 보고 싶었어”라며 웃었다. 지난 평창 올림픽..
소풍 김밥과 사실, 그 너머 진실 3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많은 부모가 긴장하고 있을 듯하다. 이 편식하는 꼬맹이가 학교 급식은 먹을지, 화장실은 제대로 갈지,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닐지 모든 게 걱정스러울 뿐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소풍 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교우관계에 촉각이 곤두서있던 터라 소풍에서 귀가한 애에게 누구랑 김밥을 먹었는지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이의 대답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혼자 먹었는데요?” 우리 애가 김밥을 같이 먹을 친구도 없다니!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더 캐물어봐도 애는 횡설수설이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엄마들끼리 이맘때 애들은 꼭 ‘찢어진 책’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는데, 딱 그 상황이었다. ‘찢어진 책’이란 뭐라고 얘기를 해주긴 하는데, 내용을 제대로 파..
세는나이를 내버려두라 맬컴 글래드웰의 에 나오는 이야기다. 캐나다 프로 하키 선수는 1~3월생이 많다. 어째서일까. 어릴 적에는 개월 수에 따라 성장차가 크다. 같은 해 태어난 아이들끼리 경쟁하면 1~3월생이 유리하다. 그 차이가 유소년 리그와 청소년 리그를 거쳐 성인 리그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내내 학급에서 키가 가장 작았던 이유를. 내 생일은 2월 하순, 속칭 ‘빠른 연생’이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동급생보다 신체적 성장이 늦은 편이었다. 모르긴 하지만 지적 성장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당시 1, 2월생 자녀의 부모들은 입학 시기를 일부러 늦추는 것도 고민해야 했다. ‘빠른 연생’이 유리한 점도 있지만 불리한 점이 많았던 모양이다. ‘빠른 연생’은 왜 생겼을까. 신학기의 시작이..
왕조의 자연 수명 이븐 할둔(1332~1406)은 북아프리카 중부의 튀니스에서 출생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한 역사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건국 후에 사망한 이색과 이성계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사하라 이북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전통이 뿌리 깊은 곳이다. 이븐 할둔은 자기 생애에 이미 이 지역에 있었던 여러 왕조에서 그 학문적 명성이 높았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서양에서 를 쓴) 투키디데스가 역사학을 창시했다면, 이븐 할둔은 역사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븐 할둔은 그의 책 (‘성찰의 책’이라는 뜻이고 한국에서는 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왕조들도 개인들처럼 자연 수명이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 죽지 않은 사람이 없고, 패망하거나 소멸하..
점입가경, 일본의 혐한 일본의 혐한 풍조가 점입가경이다. 혐한이 하나의 풍조가 된 지 오래지만, 한국 때리기가 ‘장사’가 되자 명색이 언론이라는 매체들까지 노골적으로 혐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어느 종합잡지는 한국에 대해 ‘격분과 배신’이라는 표현을 썼고, 또 다른 주간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의 병리라는 내용의 기사까지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 언론 아사히신문이 지난 16일자에 ‘혐한과 미디어, 반감 부추기는 풍조를 우려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며, 혐한 보도에 맹공을 퍼부었다. 아사히는 한국인을 싸잡아 ‘병리’ 운운한 것은 민족차별이라며, 판매 촉진이나 시청률을 목적으로 이런 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이라는 공기(公器)가 할 일인가라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앞서 10일에..
마늘이 알려준 이야기의 힘 미국에서 ‘파머스 마켓’에 간 적이 있다. 저렴하고 복작대는 시장 구경을 기대하며, 일정과 장소를 확인하려고 본 파머스 마켓의 홈페이지는 뭔가 예상과 달랐다. 아주 거창한 임무와 비전을 제시하며 특별한 척한다는 느낌을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동네 파머스 마켓의 임무는 이러했다.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작은 지역 농장을 지원하고, 도시민에게 이벤트를 제공하여 공동체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비전은 더 거창했다.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이끌고 지지하는 것”이다. 아니, 동네 파머스 마켓 ‘주제에’ 뭐 이리 비전이 거창하단 말인가! “공정 사회”, “지속가능한 환경 시스템” 같은 것은 대통령 신년사에서나 나오는 말 아닌가? 거창한 비전..
분서와 훼판 분서와 훼판은 조선시대의 금서 조치다. 분서는 시중에 유통되는 책을 모조리 수거해 소각하는 것이고, 훼판은 판목을 파괴해 더 이상 출판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분서와 훼판은 책의 생산과 유통을 금지하는 방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체제를 위협하는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탄압했다.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사상 통제가 엄격했지만, 국가가 분서와 훼판을 주도한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다. 불온한 사상을 담은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분서와 훼판을 결정짓는 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저자다. 이 그중 하나다. 은 소론계 정치인 최석정의 저술이다. 편찬에 10년이 걸린 역작이다. 1700년 숙종의 허락을 받고 국가의 출판기구 교서관에서 간행했다.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간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간행..
국가가 할 수 있는 일 2013년 그리스는 재정위기에 놓여 있었다. 즉시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유로존에서 퇴출될 상황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구제금융 실시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사실상 결정권은 독일이 가지고 있었다. 독일 국민 여론은 구제금융 실시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구제금융이 실시됐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유럽중앙은행은 유로화 사용 15개국의 국가별 가계 자산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많은 이들의 예상 밖이었다. 독일은 가계 자산 중앙값이 5만1400유로(약 7530만원)인 데 비해 그리스는 10만2000유로였다. 독일은 조사 대상 국가들 중 꼴찌였고, 그리스는 독일의 2배였다. 유럽중앙은행 발표에서 독일과 그리스 사례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당시 키프로스, 그리스, 포르투갈, 그리고 부분적 구제금융을 받은 스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