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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흥선대원군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처음으로 2000명의 청군이 서울에 진주했다. 청나라는 민씨들에게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군란의 수모자라고 보고, 그를 청으로 납치했다. 국왕의 생부에 대한 전대미문의 행동이었다. 고종과 민씨들은 환호했지만, 기쁨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대원군이 귀국한다는 풍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도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건 부담스러웠고, 조선에는 대원군 지지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특히 위정척사 세력이 강한 경상도에서는 모반 움직임까지 있었다. 어느새 대원군 귀국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1884년 2월16일 민씨정권의 군사실력자인 한규직이 일본대리공사 시마무라 히사시를 찾아와 대원군 관련 정..
호그와트 역사수업 유감 해리 포터가 다니는 호그와트 마법 학교에는 우리 같은 ‘머글’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흥미로운 수업이 가득하다. 비명을 질러대는 맨드레이크 같은 식물을 다루는 약초학 수업, 탁자를 돼지로 바꾸는 법을 가르치는 변신술 수업, 행운의 묘약을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약 수업까지. 이런 특이한 수업 속에 유일하게 머글도 수강할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빈스 교수의 마법의 역사 수업이다. 역사를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 참으로 뿌듯하다. 이것 보라! 마법의 세계에서도 역사학은 유용한 학문이다! 아쉽게도 이런 뿌듯함은 곧 쭈그러들고 만다. 마법의 역사 수업은 유일하게 유령이 가르치는 과목이라는 점 외에는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이기 때문이다. 교수가 유령이라 칠판을 스르륵 통과해서 들어온다는 것이 그나마 이 수업에서 ..
수상한 ‘만인산 성명’ 때는 구한말. 소격동 한 주사는 이 판서에게 줄을 대어 밀양군수에 임명된다. 무능력자가 관직에 오르면 결과는 뻔하다. 재정은 파탄지경, 군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임기가 끝나가자 한 주사는 유임을 위해 여론을 조작한다. 신문을 이용해 자신을 청백리로 포장하고 시정잡배를 동원해 ‘만인산’을 만들게 한다. 만인산은 1만 명의 이름을 적어넣은 양산이다. 선정을 베푼 지방관에게 백성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기념품이다. 한 주사는 싫다는 백성을 협박해 만든 만인산을 이 판서에게 보여준다. 이 판서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본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하며 한 주사의 유임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해조의 소설 (1909)의 전반부 줄거리다. 한 주사는 탐관오리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려고 만인산을..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지나간 시간과 사건들이 모두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당대인들의 생생한 경험과 기억이 소멸된 뒤, 역사가들이 주목하여 서술한 것들이 역사가 된다. 역사가들마다 동일한 사실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어떤 역사가가 서술 대상으로 선택한 사건이 다른 역사가에게는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내용이 반드시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마도 이번 3월9일 선거는 ‘촛불혁명’과 짝하여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가 끝난 뒤 각종 방송과 신문, 잡지, 그리고 팟캐스트에 이번 선거의 의미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가 넘쳐난다. 차츰 잦아들겠지만 아마도 얼마간은 이 흐름이 이어질 것이다. 이 많은 평가들 중, 시간이 지나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조선 후기에 살았던 ..
야성적 민주주의 지난 3월9일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박빙의 차이로 나온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선거 불복에 대한 우려였다. 사전투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있었던 터라, 어느 쪽이든 패자가 승복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5년 전에도 큰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 탄핵 시위 군중을 보면서, 혹시 폭력사태가 나면 어쩌나 했다. 불복과 폭력은 문자 그대로 ‘피로 쟁취한 한국 민주주의’를 파탄 낼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기우였다. 비서양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맨 먼저 실험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서양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헌법 제정(1889년)과 의회 설치(1890년)를 이룬 나라다. 1870년대에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시행한 적이 있으나 오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일본은 몇 번의 계..
나의 미시사가 거시사와 만날 때 나는 친할머니가 참 어려웠다. 내 할머니는 포용과 사랑이 아니라 까다로운 예절 교육의 아이콘이셨다. 할머니가 오시면 늘 절을 하며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이렇게 절을 올리는 것은 내 세대에는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 관습이었다. 절을 올릴 때면 상당히 긴장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팔의 각도, 어깨 자세 등을 놓고 또 한 소리를 들었고, 사촌들과 나란히 절을 할 때면 절에 대한 품평까지 각오해야 했다. 밥상머리에서 식사예절에 관한 잔소리도 한 무더기였다. 내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죽을 먹을 땐 가장자리부터 얌전히 떠먹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중학생인 내가 죽 먹는 방법까지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인가! 그래도 이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할머니의 아들 선호는 온 집안을 뒤흔들었는데, 친구들과 얘기해봐..
‘국뽕’의 시대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 한복의 기원은 중국 전통 의상.” 반중정서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그런다고 세계인이 김치와 한복을 중국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중국이 주장하는 ‘만물 중국 기원설’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남을 탓하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떳떳한가? 역사왜곡은 제국의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식민지 지식인의 저항 수단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따위의 위서가 이때 나왔다. 고대 한민족이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내용이다. 명백한 역사왜곡이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문제는 해..
율곡 이이에 비친 개혁의 궤적 선조 2, 3년 무렵 이이는 조정에 모인 패기만만한 수재형 관리들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그의 나이 34, 35세 무렵이다. 선조 즉위(1567) 무렵 사림의 주요 세력인 양심적 지식인과 젊은 관리들은 50년이나 계속된 정치적 암흑이 걷히고 개혁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정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중종·명종 대 구시대 기성 정치인들인 구신(舊臣)들을 깊이 혐오했다. 이이는 신진 엘리트 관리들을 대표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대신들은 구체제에서 여러 번 원칙과 태도를 바꿔가며 겨우 제 몸이나 보전한 사람들입니다. 벼슬이 높았던 자일수록 행동이 비열했고, 요직에 있던 자일수록 그 인간적 재질은 하등에 속합니다.” 선조 3년 조정의 큰 이슈 중 하나가 을사사화(1545) 공신 취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