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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은 과학인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관상가로 유명한 승려 혜징이 말했다.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이성계 같은 사람은 없었다.” 태종 이방원의 관상도 독특했던 모양이다. 하륜이 이방원의 장인 민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당신 사위만 한 사람은 없었다.” 효종은 왕자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를 지켜본 중국 관상쟁이가 말했다. “참으로 왕이 될 사람이다.” 고종의 관상도 범상치 않았나보다. 관상쟁이가 어린 고종의 관상을 보더니 마당으로 내려가 엎드려 말했다. “훗날 나라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이상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왕실이 관상을 신봉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길흉을 점치는 온갖 술수를 ‘명과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 포함시켰지만 관상은 예외였다...
군주의 일심 조선 시대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이 지식인과 관리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구언(求言)’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때 올라온 상소들의 첫 항목은 대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한 말이다. 그는 천하만사가 임금 마음에서 비롯되니, 임금의 마음이야말로 천하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품위는 있으나 내용은 없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것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조선의 국가체제를 수립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정도전이다. 그도 ‘군주의 일심’(君主의 一心)을 강조했다. 그는 건국 직후에 조선 최초의 법전인 을 지어, 조선의 국가체제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재상은 최고의 정책 결정자이자 집행자였다. 국정 운영에서 큰 문제는 임금과 의논하지만 그렇지..
한·일 비교의 묘미 조선후기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제 한·일 비교사(주로 조선후기와 도쿠가와 막부시대 비교)가 조금씩 가능해지고 있다. 막연한 인상 속의 사안들을 학문적으로 증명하는 경험은 짜릿하다. 그 시절에도 한국과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사회였다. 눈에 띄는 것은 문인(양반)-무인(사무라이)이라는 지배층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현격한 것이어서 일본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지배층이 상시 무장을 했던 사회일 것이다. 사무라이는 두 개의 칼을 항상 패용하고 다녔는데, 무기 사용은 정당방위 때만 허용되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면 평민이 심각한 무례를 범했을 때 그를 베는 것이 가능했다(기리스테 고멘·切捨御免). 이에 비해 조선은 비무장에 가까운 사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
공간은 인간이 완성한다 고려 말 조선 초 한 100년 정도 ‘보평청(報平廳)’이라는 전각 이름이 유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보평청이란 임금이 나와 직접 국가의 일을 처리하고 경연을 열어 학자와 함께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연구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고려 말부터 사용된 이 이름은 조선 건국 후 태조 대 경복궁과 태종 대 창덕궁의 전각에도 그대로 붙었다가 이후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려 말 사람들은 군주가 공적 장소에서 관료를 만나 정치를 논하고, 경연을 통해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이 대신과는 멀어지고 환관과 친해져 백성의 현실이나 나라의 존망에 관한 문제들을 알 수 없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사극에서는 맨날 임금과 신하가 옥신각신하던데..
명절 갈등 해소하는 방법 추석 직전, 언뜻 봐도 일흔이 넘은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다. 자연히 추석이 화제에 올랐다. 할아버지 기사님은 어린 시절 추석이 가장 좋았단다. 갖가지 음식을 배불리 먹는 날은 일년 중 추석이 유일했단다. 새 옷을 얻어 입는 날도 추석과 설날 두 번뿐이었단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뒤로도 추석과 설날만 기다렸단다. 고향이 외딴 시골이라 명절 연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어서다. 이제 기사님은 추석이 아니라도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고, 연휴가 아니라도 언제든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수십년간 반복해 온 추석의 경험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노년층에 추석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중장년층은 노년층과 같은 결핍의 경험이 없으니 추석이 특별할 이유가 없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과 친척이 반..
노년에 필요한 10가지 조선 시대 인물로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지금 유명한 사람도 있고, 그 반대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인물들 중 하나가 김정국(1485~1541)이다. 사실, 김정국보다 그의 형 김안국(1478~1543)이 더 유명하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짝하여 기억된다. 조광조는 약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기묘사화로 처형된 인물이다. 조광조가 짧은 기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진 불꽃이라면, 김안국은 그 불씨를 살려서 시대를 밝힌 횃불 같았던 사람이다. 김안국이 평생 동안 친구처럼 지냈던 인물이 자신보다 먼저 사망한 동생 김정국이다. 김안국과 김정국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재였다. 불행히도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었다. 김정국이 10세에 모친을, 12세에..
대만에서 전쟁을? 대만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6월인가 7월이었는데 더위가 말도 못했다. 교토의 여름을 겪은 적 있지만 그와는 또 다른 질식더위였다. 걷다 지쳐 들어간 식당은 더 더운 느낌이었다. 냉방 때문이 아니라, 맥주가 맛이 없었다. 게다가 차갑지도 않은 맥주라니. 주위를 둘러보니 술 마시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이 더운데 밥만 먹는구나, 의아했다. 나는 서울과 일산 다음으로 도쿄, 교토에 오래 살았다. 늘 한국과 일본을 섞어서 반으로 딱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일본은 너무 매뉴얼에 집착하고 한국은 지나치게 임기응변이다. 일본인은 눈치를 좀 덜 봤으면 좋겠고, 한국인은 주위 의식을 좀 더 했으면 좋겠다는 뭐 그런 거. 세상에 그런 사회가 있겠나 했는데, 있었다! 대만. 타이베이 거리는 ..
경복궁 경회루와 구종직 설화 경복궁 경회루에는 구종직에 대한 설화가 전한다. 젊었을 때 교서관의 종9품 하급 관원으로 궁궐에서 숙직했던 구종직은 밤을 틈타 경회루를 몰래 구경하다, 밤마실을 나온 세종과 딱 마주쳤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던 찰나, 임금은 그를 용서했다. 거기에 그가 (공자가 엮은 것으로 알려진 역사서) 한 권을 막힘없이 술술 외우자, 그 다음날로 종5품의 부교리로 임명하였다. 파격적인 인사에 신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벌떼같이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세종은 “그럼, 너희들도 를 외워보라”며 관원들과 구종직을 시험했으나, 구종직만이 줄줄이 외워냈다. 세종이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좋은 관직에 올라 있는데, 구종직이 이 벼슬을 맡지 못할 이유가 어딨느냐?”라며 면박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제도에 얽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