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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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후지코시 여자근로정신대 끝나지 않은 싸움 ㆍ‘쇠 깎는 공장’ 끌려간 어린 딸들, 아직도 ‘뼈 깎는 고통’ 나카가와 미유키 | 호쿠리쿠연락회 도야마 사무국장 ‘도야마에 올 땐 기뻤네. 하룻밤 지새니 슬퍼지네. 언제쯤 이 공장을 떠날 수 있을까. 아~ 아~ 숨어서 우는 눈물아.’ 65년 전, 공장 인근의 다테야마(立山·일본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산)를 바라볼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소녀들이 있었다. 일본 도야마의 군수공장인 후지코시에 ‘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 연행당한 한국인 소녀들이다. 그 피해자들은 지금 한국인 강제연행 소송의 마지막인 ‘후지코시 소송’에서 싸우고 있다.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선반으로 쇠를 깎는 중노동을 하고 있다. | 나카가와 미유키 제공 기계공구 제조사인 후지코시는 1928년 도야마 시에서 창업했다. ..
(7)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ㆍ日권력자들, 천재지변 공포 속 조선인을 정국수습 도구로 ㆍ재일한국인 6000여명 유언비어로 ‘불령선인’ 낙인, 日 자경단 등에 처참히 살해 김종수 | 1923간토시민연대 한국상임대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한·일·재일 시민의 네 번째 공동현장연구가 시작되던 2009년 8월11일 새벽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곤히 잠든 연구단원들을 깨운 것은 지진이었다. 몇 차례 호텔을 심하게 흔들어놓자 연구단원들은 사색이 되어 아연 긴장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1923년 9월의 첫날에 일어난 지진 공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도쿄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도시 바람이 몰려 한낮의 최고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돈다는 사이타마현의 기온이 전날 쏟아진 소나기로 예상..
(6) B·C급 전범과 시베리아 억류자의 한 ㆍ강제징용된 조선 청년들, 일제 희생양으로 ‘전범의 굴레’ 아리미쓰 겐 |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익숙지 않을지 모르겠다. 1945년 이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을 강요당했다. 강제징용 뒤 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으로 끌려가 포로감시원으로 일하며, ‘한국 간수(Korean Guard)’라고 불린 이들은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 청년들이었다.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청년들이 부족한 전투요원을 메우기 위해 포로감시원으로 징집됐다.일본은 태평양전쟁 초기의 승리로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 등 많은 연합군 포로를 붙잡았으나 포로 처우에 관한 아무런 체제나 방법이 없었다. 포로 처우에 관한 국제인도법(제네바 조약)에 관해 일본군 병사나 포로..
(5) 한반도서 첫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 ㆍ논밭 복판에 유곽 풍해루·은월루… 전쟁 이전부터 ‘비명 소리’ 사오 나노코 (필명) 넓고 완만한 언덕에 푸른 논밭이 펼쳐지고, 그 사이사이에 집들이 건성드뭇하다. 그런 반농반어(半農半漁) 마을 구석의 언덕 위에 그 건물은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동. 북한이 ‘위안소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그 자리에는 일제시대에 지은 ‘위안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군 위안소로 이용된 은월루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는 마을 진료소로 사용되고 있다. | 사토 나오코 제공 두 군데 있었던 방진의 위안소는 각각 ‘풍해루(豊海樓)’와 ‘은월루(銀月樓)’라고 불렸다. 당시 경성 등 큰 도시에 많았던 ‘유곽’으로 흔한 이름이다. 주변에는 건물다운 건물이 없었다. 그러나 방진의 풍해..
(4) 위안부 피해 ‘국민기금’으로 치유될 수 있나 ㆍ‘국가배상 아닌 위로금’ 日정부, 자국민에 가해책임 떠넘겨 이성순 |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2007년 3월 말 12년간의 사업을 마치고 해산했다. 한국·대만·필리핀 3개 지역에서 피해자 285명에게 기금을 지급했다고 하지만, 기금의 지역별 지급상황이나 피해자 신상은 극비사항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텨 자세한 내용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1997년 1월15일 서울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은례 할머니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반대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외견상 한국·필리핀·대만·인도네시아·네덜란드 등의..
(3) 재일조선인의 인간적 권리 무망한가 ㆍ‘제국신민’서 ‘외국인’으로… 일개 관료가 간단히 ‘국적 박탈’ 윤건차 | 가나가와대 교수 한국에서 재일조선인은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재외동포이자 디아스포라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특히 매스미디어와 대학 등 연구기관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일반적으로 잘 알려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재일조선인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일본의 조선 식민지지배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도 옛 종주국인 일본에 살고 있으나, 대부분 한국이나 조선 국적 혹은 국적 표시를 갖고 있을 뿐 일본 국적은 취득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역시 하나의 민..
(2) 헛되지 않은 10년 투쟁 ‘군인·군속재판’ ㆍ야스쿠니 합사 정부관여 인정한 日법원 “책임은 못물어” 아노 히데키 2001년 6월29일, 이날은 일본에서 진행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소송의 역사에서 뜻 깊은 날이었다. 일제 강점기 군인·군속 출신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25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피해 보상, 야스쿠니 합사 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단소송을 벌인 것이다. 1년여간 소송지원단과 변호사, 피해자와 유족들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휴일도 없이 만나 원고들의 신상 파악과 진술서 작성, 번역에 매달렸다. 소송 진행을 위한 모금활동도 함께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십수년 동안 일본에서 강제동원피해자 소송 지원운동을 해왔던 많은 사람들이 이 재판 운동으로 결집했다. 이렇게 시작된 재한 군인·군속재판(이하 군군재판)은 2003년 6월12일 ..
(1)-2 치유 안된 기억, 미래를 위한 기록 ㆍ일 정부 피해회복 요구 거부 여전…과거사 재정립·대안 모색 계기로 김학순 대기자 100년 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불법적으로 강제한 한반도 식민지배는 영원히 지울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상흔을 남겨놓았다. 그 후유증도 완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광대하다. 일본 제국과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강요당한 무수한 조선 민중. 반인도적 전쟁범죄의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여성. 어린 나이에 사기와 협박에 의해 끌려간 여자근로정신대원. 참전을 강요당한 뒤 BC급 전범 판결을 받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포로감시원. 군인으로 끌려갔다가 태평양 전쟁 이후 버려진 시베리아 억류자. 강제징용 등으로 동원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미귀환자. 탄광·비행장·철도공사장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간 노동자. 관동대지진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