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따뜻한’ 중세의 꿈

17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을 비롯해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에서 부르주아지가 약진을 거듭했다. 그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발전시켰다. 부르주아는 자유와 평등의 신념을 표방하며 봉건적 사회질서를 무너뜨렸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사회가 크게 변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명백하였다.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서 자유를 얻은 것은 부르주아지뿐이었다. 대다수 평민은 여전히 피지배층으로 남아 있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생산이 대폭 증가하였다. 그러나 공정한 분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은 어느 면에서든 그다지 평등해지지 않았다. 사회적 모순도 해결의 조짐을 보이기는커녕, 더욱더 복잡하게 엉클어졌다. 그런 가운데 대규모 공장이 속속 증가했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넘어섰다.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경제공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할 지경이었다. 그로 인해 영국에서는 약 20년간에 걸쳐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부르주아가 독식하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폭발한 셈이었다. 노동자로 대표되는 대중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은 꽤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펼쳤다. 의회의 개혁을 요구했고,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권을 주장했다. 그들은 무기명 투표를 시행하자고 했으며, 의원들에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 깨끗한 정치풍토를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 영국 노동자들은 일련의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합세했다. 아일랜드의 젠트리 출신으로 현직 하원의원이었던 퍼거스 오코너가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협동조합운동의 창시자였던 로버트 오언도 이 운동을 이끌었다. 차티스트 운동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이 탄생했다.

 

프랑스에서도 부르주아지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눈부셨다.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1871년에는 파리코뮌의 등장으로 대중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였다.

 

뜻밖에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가장 강도 높게 반응한 것은 독일 지식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낭만주의자들의 반발이 컸다. 그들은 중세사회의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중세는 ‘따뜻한’ 사회였다. 이와 같은 회고적 감정이 독일 낭만주의의 큰 특징이었다. 그들로서는 냉혹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그에 기초한 근대 시민사회의 정당성이 의심스럽기만 했다.

 

독일 지식인들의 지적 취향은 갈수록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 정점에 헤겔(1770~1831)이 있었다. 헤겔은 <법철학>이란 책에서 가족, 시민사회 및 국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한마디로, 헤겔은 근대 시민사회를 철저히 부정했다. 시민사회는 개인의 사익 추구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에는 내적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었다. 자본주의의 길은 거대한 빈곤층의 탄생으로 귀결된다는 것. 그리하여 근대 시민사회는 비참한 상태에 빠질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파탄지경에 이르고야 만다고 결론지었다.

 

헤겔은 문제의 해결책을 국가 이성에서 찾고자 했다. 그에게 국가란 구성원 모두에게 정의와 공정을 선사하는 이성적 존재였다. 국가야말로 자본주의의 폐단으로부터 대중을 구원하는 올바른 정치적 수단이라는 것이 헤겔의 확신이었다. 근대국가는 고결한 도덕성의 산 표본이자 참된 자유를 상징하는 각별한 존재여야 했다.

 

헤겔의 지적 전통은 20세기까지도 독일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페르디난트 퇴니에스 같은 학자는 인류사회를 두 종류로 구별할 정도였다. 그는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을 게젤샤프트라 부르며 호되게 비판했다. 그런 집단은 일시적이고 아무 내실도 없는 공동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게마인샤프트는 정반대의 집단이었다. 이는 명실상부한 공동체로서 인간애라는 중세적 이상을 회복할 인류의 희망이었다.

 

근대 독일의 철학적 흐름을 살피다가 나는 잠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에 주목했다. 독일 낭만주의부터 헤겔에 이르는 지적 전통이 조선의 성리학자들과 흡사했다는 점이다. 독일의 철학자들만큼이나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고전사회를 동경하고 이상화했다. 그들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했다. 국가를 도덕적 이상의 정화(精華)로 여긴 점에서 독일 지식인들은 조선의 선비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두 집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독일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산업과 교역의 기능도 중시했다. 또 서양 근대의 문화적 유산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지나치게 자급자족에 매달렸다. 성리학자들은 산업을 토대로 한 도시 문명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였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지식인들이 두 나라의 진로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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