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곤혹스러운 실학자들

조선 후기사 연구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가 ‘실학’이다. 그런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늘 ‘실학’이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재야의 실학자들이 아무리 좋은 의견을 내도 그것이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에서 더욱 굳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유형원(1622~1673)의 공전제, 성호 이익(1681~1763)과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한전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정전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토지개혁론은 실학자들 사회개혁론의 핵심이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토지 소유 불균등이 조선 후기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요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개혁을 말하면 말할수록 그들의 주장은 더욱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사회적 처지 때문이다. 그들은 조정에서 관련 정책을 다루던 고위관료가 아니었고, 많은 지식인 제자들을 둔 재야의 영향력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지에 귀양 가있는 죄수나 무직의 룸펜, 기껏해야 가난한 프리랜서였다. 그들이 ‘현실’을 이야기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처지가 되어봐야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사 연구에서도 비슷하다. 역사 연구의 가장 큰 효용은 과거에서 현재를 위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E H 카의 유명한 언명,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부단한 대화”라는 말도 크게 보면 같은 범주에 있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현재 상황에 과거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없다면 역사 연구는 과거에 대한 지식을 늘려줄지언정 현재와의 쌍방향 대화를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요즘 세간에 가장 회자되는 주제가 불평등, ‘수저론’, 그리고 그것들에서 비롯되는 ‘갑질’의 문제다. ‘적폐청산’은 현 정부의 임무로 여겨진다. 마침내(!) 현재의 한국은 조선 후기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실학자들 주장에서 가장 중심에 있던 것이 토지제도 개혁론이었다. 조선은 개혁 이론이 부족한 나라는 아니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토지제도 개혁을 토대로 한 총체적 사회 개혁안이다. 그 방대함과 정교함은 지금 보아도 놀랍다. 유형원이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문제로 들었던 것은 토지 ‘겸병’과 ‘은결’이다. ‘겸병’이란 자기 땅을 남에게 빌려주어 농사짓게 하고 그 수확물을 경작자와 나누는 것이다. 대개 수확의 절반 정도를 지대(地代)로 받았다. 오늘날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월세를 받는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은결’이란 세금 부과 대상에서 불법적으로 누락된 토지, 세금 안 내는 토지를 말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탈세 대상이 되는 자산, 혹은 지하경제에 속한 자산이다.

 

유형원은 문제의 해법으로 공전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작자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부양할 정도의 토지를 가져야 하고, 거기에서 제대로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영세한 농가가 이미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방법이다. 그런데, 그는 이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다. 성호 이익과 연암 박지원은 한전론을 주장했다. 이익의 주장에서 핵심은 ‘영업전(永業田)’이다. 평균적인 농가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토지, 즉 영업전을 팔 수 없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최저임금제’의 근본 취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익의 주장은 실시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박지원의 한전론이다. 그는 영세한 농가가 얼마 되지 않는 자기 땅마저 팔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저 부유한 겸병자들도 가난한 이들의 땅을 강제로 팔게 하여 자기 소유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아무 소리 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땅을 팔려는 사람들이 제 손으로 토지문서를 가지고 매일 부잣집 문전에 찾아옵니다.” 영세한 농민들은 흉년에 버틸 여유가 없었다. 흉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내년은 어찌 되든 땅이라도 팔아서 당장 호구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경제가 안 좋으면 영세자영업자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익이 토지 소유의 하한을 지켜내려 했던 것과 반대로, 박지원은 부자들 토지 소유 규모의 상한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조선 정부가 부자들이 땅 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박지원의 주장도 이익의 주장처럼 실시되지 못했다.

 

실학자들 개혁론의 중심에는 토지개혁이 있었다. 그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개혁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했다. 정작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침묵하거나 애매했다는 점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은 분명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침묵하거나 애매하게 말했던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이 순진했던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고지식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 ‘어떻게’에 가해지는 현실의 압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기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답답하지만, 그들은 지금 우리보다 더 곤혹스러웠다.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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