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경향의 눈]3·1운동 100주년, 첫발도 못 뗀 안중근 유해 찾기

지난주 중국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2014년 1월 하얼빈역에 개관했다. 3년 뒤 역 확장을 위해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이전했는데, 2년 만에 원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하얼빈의 안 의사 기념관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안 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우호적 태도가 유해발굴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유해발굴은 녹록지 않다. 기나긴 유해찾기의 역사가 말해준다. 


안 의사 유해찾기에 처음 나선 이는 백범 김구였다. 백범은 1945년 환국 직후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해봉환을 추진했다. 이듬해 5월 일본에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들여와 효창원에 안장했다. 그러나 백범이 가장 모시고 싶은 애국지사는 안중근 의사였다. 그에게 안 의사는 ‘독립운동계의 신주(神主)’였다. 그러나 내전 상태인 중국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백범은 1948년 4월 평양 남북협상에서 만난 김일성에게 유해찾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남북통일 후에 추진하자고 애기하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북한은 1970년대 중반 영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를 만들면서 유해찾기 조사단을 꾸렸다. 조사단은 중국 협조를 받아 뤼순 감옥 주변을 조사했으나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북한은 안 의사 유해찾기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를 맞은 3월 26일 한 관람객이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다. 안 의사는 항일의 뜻을 위해 왼쪽 넷째 손가락을 잘랐고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강윤중 기자


남한에서는 1960~1970년대 안중근 자서전과 친필유묵이 공개되면서 안 의사를 다시 주목했다. 1984년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본격 유해찾기에 나섰다. 안 의사 유해를 독립기념관에 봉안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안 의사의 출생지라는 연고권을 내세우며 반대하면서 유야무야됐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정부가 중국에 유해봉환 협조를 요청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2000년 10월에는 남북 천주교계가 공동으로 유해발굴을 위한 협력을 모색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 역시 일회성 행사에 그치고 말았다.


2006년 6월, ‘안중근 의사 유해 남북한 공동발굴단’이 구성됐다. 발굴단은 중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묘역을 ‘뤼순 감옥 뒷산 일대’로 확정한 뒤 2008년 4월 발굴에 들어갔다. 그러나 묘역 추정지에 아파트공사가 진행되는 데다 발굴과정에서 중국의 통제가 심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남북이 처음 유해 공동발굴에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후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 공동발굴 계획은 무산됐다. 정부는 대신 민관합동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을 만들었지만, 여태껏 개점휴업 상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 유해찾기가 재추진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지난달 보훈처도 같은 계획을 밝혔다. 계획은 거창하지만 청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관련 회의 개최 소식도 없다. 중국은 남북이 합의해야 발굴을 허가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의 참여 가능성은 미지수다. 유해 매장지가 뤼순 감옥 뒷산인지, 감옥 오른쪽의 동산파인지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유해발굴의 목소리는 높지만 정부는 아직 첫발도 떼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 안중근 유해발굴은 쉽지 않다. 북한이 추진하다 포기했고, 남북이 공동발굴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료는 멸실되고 유해 매장지의 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안 의사에 대한 국민의 예우이자 의무다. 경계할 점은 대의명분을 앞세워 유해찾기를 이벤트화하는 일이다. 준비 없는 ‘유해발굴’은 안 의사를 모독하고 국민에게 환상만 심어줄 뿐이다. 발굴을 위한 구체적 근거와 객관적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정권마다 집권 초기에는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해찾기가 이벤트적인 정권 홍보로 전락하면서 번번이 시작 단계에서 끝이 났다. 제대로 된 백서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유해찾기의 연속성과 연구 성과의 축적을 위해 정부 대신 학계가 중심이 된 ‘유해발굴 추진단’이 필요하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직전,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나의 유해는 조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하얼빈 국제공원에 매장하고 조국의 주권이 회복되었을 때 고국으로 이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국이 광복된 지 70여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안 의사 유해 봉환은커녕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찾기는 유지를 받드는 일이자 과거사를 청산하는 일이다. 또한 안 의사의 비극적이고 비정상적인 죽음을 정상으로 되돌리며 역사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힘들지만 가야 할 길이다. 내년은 안 의사 순국 110주년이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