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임정 마지막 청사 경교장

1945년 11월23일,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4명과 함께 김포 비행장으로 환국했다. 공항에서 동포들의 환영을 받은 백범은 곧장 죽첨장으로 향했다. 죽첨장은 금광업자 최창학이 1938년 지은 저택으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최창학은 골수 친일파였다.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며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자 백범에게 저택을 제공하며 애국자 행세를 했다.


미 군정이 왜색 지우기에 나서면서 죽첨장은 경교장으로 바뀌었다. 인근에 있었던 경구교(京口橋·서울 들머리 다리)에서 이름을 땄다. 응접실과 당구실, 전용 이발실까지 갖춘 대저택인 경교장은 백범 가족이 살기에는 너무 크고 화려했다. 백범은 집이 없어 한미호텔에서 묵고 있던 임정 요인들을 불러들였다. 김규식, 김원봉, 신익희, 엄항섭, 이시영, 조소앙 등이 경교장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백범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섰다. 그해 12월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국무위원회를 개최하면서 경교장은 임정의 청사로 거듭났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의했을 때에는 반탁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반탁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반탁 시위 포고문을 발표했다. 미 군정청 관리들은 임정 요인을 만나러 수시로 경교장을 드나들었다. 백범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평양행을 발표했을 때 경교장 앞마당은 찬반 시위대로 들끓었다. 


경교장은 해방 후 임시정부 활동의 중심 무대였다. 임정은 미 군정의 반대로 정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경교장에서 함께 숙식하고 토론하면서 해방 정국을 이끌어갔다. 이들의 활동으로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국호, 정부조직, 정치체제를 계승할 수 있었다. 1949년 6월26일 백범이 흉탄에 서거하면서 임정의 경교장 시대는 끝났다. 그 뒤 오랫동안 경교장은 백범의 거처 또는 서거지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곳은 1919년 상하이에서 시작해 광저우, 충칭 등 중국 대륙을 전전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처였다. 2013년 경교장은 임시정부 청사로 복원됐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