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조선시대 3대 정원’

‘주변의 산은 높더라도 험준하게 솟은 정도가 아니요, 낮더라도 무덤처럼 가라앉은 정도가 아니어야 좋다. 주택은 화려하더라도 지나치게 사치한 정도가 아니어야 좋다. 동산은 완만하게 이어지면서도 한 곳으로 집중되어야 좋다.’ 200년 전 서유구가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에서 밝힌 집터 잡는(相宅·상택) 법이다.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분화되면서 사대부의 생활이 주거와 조경에 눈을 뜰 정도로 나아졌다는 증거다.


서유구가 터잡기, 집짓기 법을 얘기할 때 한양에는 저택과 정원, 별장들이 들어섰다. 사대문 안에서는 정동의 심상규 저택, 삼청동의 김조순 별장 ‘옥호산방’이 호화로움을 뽐냈고, 도성 밖에서는 서유구의 번동 별장인 자연경실, 홍양호의 우이동 소귀당이 입에 오르내렸다. ‘성락원(城樂園)’이 조성된 것도 이즈음이다. 성락원은 산등성이를 뒤로하고 좌우로 언덕을 끼고, 두 물줄기가 하나의 계곡으로 모이는 입지를 갖췄다. 서유구가 말한 ‘상택’에 부합한다. ‘藏氷家’(장빙가)를 비롯한 바위글씨들은 옛 운치를 더한다. 


지난 4월23일 한시개방되었던 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전통정원 성락원.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라고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심상응이라는 인물은 찾아내지 못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4월 성락원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시대 3대 정원’ ‘200년 된 비밀 정원’ 등의 찬사가 이어지면서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1992년 사적(제378호) 지정, 2008년 명승(제35호) 재지정 등 문화재청의 잇단 ‘공인’도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성락원은 공개 두 달도 채 안돼 논란에 휩싸였다. 문화재 지정 근거의 하나로 ‘조선 철종조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을 내세웠지만 심상응은 허구 인물로 밝혀졌다. 또 정자와 연못은 조선시대 유적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성락원의 원래 주인이 잘못 고증됐다고 해서 그것의 경관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헌 검토,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문제다. 근거 없이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포장하는 것도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정원·누정 연구가 김세호 박사(성균관대)는 성락원이 19세기 문인 황윤명의 별장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늦었지만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문화재청이 재조사에 나서겠다고 하니, 성락원의 연원·역사가 학술적으로 밝혀지길 기대한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