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톈안먼 광장

톈안먼(天安門) 광장은 명·청 양대 왕조의 황성인 베이징고궁(쯔진청)의 정문 앞 너른 마당을 말한다. 원래는 담장이 쳐진 궁정의 뜰이었으나 1914년 도시 정비를 하면서 광장의 면모를 갖췄다. 남북 880m, 동서 500m, 총면적 44만㎡(약 15만평) 크기로 도심광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광장 중앙에 인민영웅기념비와 마오쩌둥기념관이, 동서에 각각 중국국가박물관과 인민대회당이 있다. 


톈안먼 광장은 중국 정치의 1번지다. 인민대회당 말고도 행정·사법부의 주요 건물들이 톈안먼 주변에 포진해 있다. 국가영도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 역시 지근거리다. 정치의 중심답게 중국 근현대의 사건, 집회·시위, 의전 행사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19년 5월4일 베이징대학 등 시내 13개 대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4운동의 시작이었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은 톈안먼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을 선언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엔 전국의 홍위병들이 모여 군중집회를 열었다. 


‘6·4 톈안먼 사태’의 진원지 역시 이곳이다. 1989년 4월15일 베이징 시민들은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 모여 민주화·반부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한 달 이상 계속됐다. 6월3~4일, 시위 군중이 100만명에 육박하자 인민해방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유혈진압했다. 중국 당국이 밝힌 희생자는 수백명이지만, 1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6·4 톈안먼 사태’는 중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다.


베이징고궁을 끼고 있는 톈안먼 광장은 하루 수만명의 내외국인들이 찾는 중국 최대 관광 명소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30년 전의 대학살극을 알지 못한다. 당국이 인민의 눈, 귀, 입을 막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터넷, 신문, 방송에서 ‘톈안먼 사태’ ‘6·4’는 찾을 수 없다. 매년 6월 톈안먼 광장은 철책 바리케이드로 둘러싸인다. 광장에 들어가려면 엄격한 검문검색을 받아야 한다. 30주년인 올해엔 광장 곳곳에 인공지능 안면인식 카메라가 장착된 CCTV까지 목격됐다. 톈안먼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다. ‘감시사회’ 중국의 축소판이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