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서원과 퇴계 이황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 반대도 적지 않다. 조선이 수입한 서원(書院)이 대표적이다. 서원은 당나라 말 혼란기에 지식인들이 산중으로 들어가 불교 선원을 본떠 만든 교육공동체가 시초다. 뒷날 향촌의 사립 교육기관이 된 서원은 송나라 때 꽃을 피웠다. 허난의 숭양(嵩陽)서원과 응천(應天)서원, 후난의 악록(岳麓)서원, 장시의 백록동(白鹿洞)서원은 송대 4대서원으로 꼽힌다. 이후는 쇠퇴기다. 명나라는 서원이 정치활동 장소로 변질됐다며 탄압했고, 청나라는 관학기관에 편입하려 했다.


조선에서는 1543년 세운 백운동서원이 효시다. 설립자는 주세붕이지만 서원을 세상에 알린 이는 퇴계 이황이다. 그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최초로 정부 공인을 받았다. 퇴계는 서원의 기획자이자 건축가였다. 안동의 역동서원은 퇴계의 발의로 세워졌다. 서원은 학문 연구, 제자 양성, 서적 보관을 목적으로 출발했다. 뒤에는 선현 제사 기능이 추가됐다. 퇴계는 서원을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다.


퇴계의 제자들은 도산서원을 세우면서 스승의 뜻을 잃지 않으려 했다. 도산서원은 중앙 강당의 좌우에 기숙사를 두고, 뒤쪽에 선현을 제사하는 사당을 두었다. 이러한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는 뒤에도 계승됐다. 주목할 대목은 도산서당을 도산서원에 포함시킨 점이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설계하고 지었다. 퇴계는 서당에서 제자들을 길러냈고, 제자들은 서원에서 스승을 기리고 후학을 가르쳤다. 조선의 서원은 산중에 있었지만 폐쇄적이지 않았다. “귓가에 책 읽는 소리 쟁쟁하지만, 마음은 온통 나라와 천하의 일에 쏠려 있다”는 말처럼 학인들은 국사(國事)를 주시했다. 조선 유학자들의 날선 상소와 의병 투쟁의 뿌리는 서원이었다.


내달이면 도산서원을 비롯한 조선시대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정식 등재된다. 성리학 전파에 기여하며 정형성을 갖춘 건축문화를 이룩한 점이 평가받았다고 한다. 서원이 한꺼번에 세계유산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숭양서원만이 소림사 등의 역사건축군에 포함돼 세계유산에 등재됐을 뿐이다. 문화의 창조적 수용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