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경향의 눈]래여애반다라

지난해 지인이 말했다. “춘천박물관의 전시가 볼만합니다. 시간 내어 가보세요.” 얼핏 오백나한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흘려들었다. ‘전시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춘천까지 가서 본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또 그 전시를 추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2018년 최고의 전시회’라는 얘기와 함께.


지난달 말 국립중앙박물관의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 개최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지인의 말을 수긍했다. 전시장은 산사의 선방이었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나한상들은 정진하는 스님 같았다. 좌대 위의 나한상은 제각각 다른 모습, 다른 표정이었다. 손을 모은 나한, 두건을 쓴 나한, 합장하는 나한, 가사를 걸친 나한, 바위 위에 앉은 나한, 보주를 든 나한 …. 한 자(30㎝) 남짓의 비슷한 크기의 나한상은 울퉁불퉁 제멋대로였다. 윤곽도 분명치 않았다. 가까이 보면 그저 투박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질감이 형상을 압도했다. 1~2m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에야 형상이 살아났다. 미소를 띤 나한, 슬픔에 잠긴 나한, 찬탄하는 나한 …. 응시하는 순간 나한이 아니었다. 어느덧 어머니로 변해 있었고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한은 깨달음에 이른 석가모니의 제자를 말한다. 나한은 한때 번민하는 인간이었지만, 수행으로 해탈을 얻은 성자(聖者)다. 범인이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올랐으니 동경과 경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십육나한도가 그려지고, 오백나한상이 만들어졌다. 불전에 모신 나한상은 조각이 정교하고 색깔이 화려하다. 남양주 흥국사에 모셔진 목조 십육나한상(보물 제1798호)과 영천 거조암 영산전을 꽉 채운 석조 오백나한상이 대표적이다. 옛날 사람들은 나한상을 모시고 평온과 무탈을 기원했다. 기우제를 올릴 때면 항상 함께했다. 나한이 질병을 없애고 재앙을 쫓는다고 믿었다. 


창령사의 오백나한상은 다르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보일 정도다. 수줍은 듯하면서 해맑다. 볼수록 친근하고 마음이 푸근하다. 떠받들어야 하는 존자(尊者)가 아니라 공감하고 위로하는 가족이자 친구다. 나한상은 조선 중기 창령사가 사라지면서 수백년 땅속에 묻혀 있었다. 땅을 고르던 농부가 발견해 빛을 봤다는 이야기는 중국 시안의 병마용 발굴기를 떠오르게 한다. 병마용의 무인상은 당시 진나라 사람을 모델로 했다는데, 창령사 나한상은 하나같이 조선의 얼굴이다. 이름대로 오백의 나한이어야 하는데 317구만 발굴됐다. 그나마 온전한 것은 64구이고, 나머지는 파불됐거나 훼불됐다. 부서지고 깨지고 마모된 나한상에 삶의 무게에 짓눌린 서민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지난 주말 박물관을 다시 찾았다. 두 번째여서인지 익숙하고 정겹다. 편안하다. 전시장의 나한상들 사이로 조용조용 거닐어본다. 방금 지나쳤는데, 돌아서서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옷깃을 잡아끄는 것 같다. 나한들이 속삭인다. 속삭임이 모여 노래가 된다. 학창 시절 배웠던 노래 가사다. ‘오라 오라 오라(來如來如來如)/오라 슬프더라(來如哀反多羅)/슬픔 많은 중생들이여(哀反多矣徒良)/공덕 닦으러 오라(功德修叱如良來如).’ 신라 향가 ‘풍요’다. 천오백년 전 선덕여왕 때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왕경 경주의 남녀들이 동원됐다. 진흙을 운반하고 다지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들은 불상을 만드는 일이 바로 부처님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믿었다. ‘풍요’는 신라인들이 속세의 고통과 번뇌를 잊고자 불렀던 집단 노동요였다.


‘래여애반다라’는 시인 이성복의 7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은 10여년 전 경주의 불상전시회를 보고 ‘래여애반다라’ 연작시를 썼다고 한다. 그의 시는 고통과 절망을 마주하며 사는 현대인을 노래한 21세기판 ‘풍요’다. 그는 ‘래여애반다라’를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맛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다(羅)’로 풀었다. 창령사 오백나한전은 또 하나의 ‘래여애반다라’였다.


어디 신라인들뿐일까. 예나 지금이나 노동은 고되다. ‘인생고해’는 싯다르타의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서러운 삶이다. 3만달러 시대가 무색하다. 주52시간제, 최저임금제 등 근대적 제도 속에서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등으로 노동은 분화되고 영세 자영업자, 세입자, 청년 실업자 등 소외층은 늘고 있다. 결전을 앞둔 투우가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케렌시아’라고 한다. 노동에 지치고 삶이 서러운 현대인에게도 휴식과 충전이 필요하다. 두 차례 만난 청령사 오백나한상은 나의 ‘케렌시아’였다. 그들의 노래가 귓가에 쟁쟁하다. ‘래여래여래여/래여애반다라/애반다의도량(오라 오라 오라/오라 슬프더라/슬픔 많은 중생들이여).’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