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편집국에서]성락원, 반가움과 아쉬움으로 만나다

전국 곳곳에 옛사람들이 바위에 글을 새긴 각석들이 남아 있다. 지금에야 처벌받아 마땅한 자연환경 훼손이지만 한편으론 역사와 문화 연구에 없어선 안될 1차 사료다.


각석은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이 많이 남겼다. 시를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서화는 그들이 기본으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개인적으론 물론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인 시사(詩社), 친목도모를 위한 계회(契會)도 결성해 자연 속에서 모임을 열고 심신을 수양했다. 그러고는 그 정취를 각자하거나 기록화인 계회도로 남겼다. 권력·재력을 겸비한 사대부는 한양도성 근처에 아예 별서(별장)를 지었다. 각석과 계회도, 별서는 모두 빼어난 자연경관과 밀접하다.


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전통정원(명승 제35호) 성락원(城樂園)이 23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돼 관람객들이 안뜰의 연못인 영벽지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다가 고종 아들 의친왕 이강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이상훈 기자


최근 서울 시내에 있는 조선 후기의 별서정원인 ‘성락원(城樂園)’을 둘러봤다. 그동안 특별한 경우에만 볼 수 있었던 성락원이 내년 공식개방에 앞서 처음으로 시민에게 임시개방해서다.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35호)이지만 사유지다보니 개방이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왕실정원과 달리 별서정원의 ‘멋과 맛’이 뛰어나 알음알음 꽤 알려진 곳이다. 물론 성락원처럼 명승으로 지정된 곳은 많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 윤선도 원림, 예천 초간정 원림, 강진 백운동 원림 등을 비롯해 서울에도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36호), 석파정 등이 있다. 그럼에도 선잠단로(성북동)에 자리한 성락원은 도심 속 ‘숨겨진 정원’으로 주목받았다. 철종(재위 1849~1863)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본격 조성한 성락원은 의친왕(이강·1877~1955)이 별저로도 사용했다. 이후 1950년대 심상응의 후손인 고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이 인수, 그 후손들이 지켜냈다.


성락원을 반갑게 만났다. 철대문을 열고 앞뜰에 들어서니 조선시대 전통적 공간구성이 그렇듯 계곡을 끼고 야트막한 인공산을 조성, 정원의 중심인 안뜰을 보이지 않게 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경치를 만나게 한다는 일보일경(一步一景)의 미학을 구현한 것이다.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를 지나 안뜰로 들어섰다. 별서정원의 핵심 요소인 푸른 산, 너럭바위·통바위들이 어우러진 계곡, 바위 위로 흐르는 물(계류), 그 물을 모은 연못이 방문객을 맞는다.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도 지닌 연못은 성락원 담장 안에 두 개가 있다. 안뜰의 ‘영벽지’와 계곡 상류이자 뒤뜰의 정자인 ‘송석정’ 앞의 윗연못이다. 계류가 위쪽 연못에 모였다가 바위에 새긴 좁은 수로를 따라 흐르면서 작은 폭포들을 만들고 영벽지로 흘러든다. 송석정에 오르니 남산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분명 서울 시내인데 안온하다. 역시 성락원에도 추사 김정희 글씨를 새긴 ‘檣氷家’(장빙가·고드름이 매달린 집) 등 각석들이 있다.


개발바람 속에 이렇게 보존된 것이 다시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그런데 아쉬움도 남는다. 별서정원의 주요 구성물인 당대 건축물이 없다. 5동의 건물이 있지만 모두 1950년대 이후 들어섰다. 그러다보니 옛 현판이나 서화도 볼 수 없었다. 윗연못의 콘크리트 옹벽, 경관을 압도하는 살림집, 무엇보다 승용차가 살림집으로 오갈 수 있게 계곡을 가로질러 쌓은 석축은 안뜰에서 뒤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중간에서 턱 막는다.


우리의 옛 건축적 공간구성의 특징은 자연환경을 살린다는 것이다. 손을 대더라도 인공미의 창출이 아니라 자연적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정자나 담장 같은 구조물을 세우더라도 절묘하게 안과 밖을 단절시키지 않아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중국, 일본과의 차별점이기도 하다. 또 나무나 꽃 하나도 생태적·기능적·미적 효과를 따졌고, 주인의 사상과 철학을 투영시켰다. 별서와 그 정원은 주인은 물론 찾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성찰하게 했다. 심신수양의 공간이자 문화교류의 사랑방, 학문을 닦는 전당이기도 했다. 우리가 전통 문화공간으로 보존하는 이유다.


성락원은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복원정비 사업을 하고 있다. 약 70%가 진행됐다고 한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 보인다. 정성스럽고 치밀한 복원정비를 통해 역사와 문화가 살아숨쉬는 쉼터,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유공간이자 문화유산의 현대적 활용의 모범이 돼야 한다. 영벽지 서쪽 바위엔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 구절을 인용한 시가 새겨져 있다.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廬’(명월송간조 청천석상류 청산수루 오애오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로 흐르고 푸른 산이 겹겹이 쌓이니 나는 내 오두막을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아쉬움을 시로 달래며 성락원이 현대적 의미의 ‘별장’보다는 조선 후기 정원문화를 간직한 ‘별서’로 거듭나 시민들이 다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도재기 문화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