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정선과 이병연의 ‘콜라보’

“자네와 나는 합쳐야…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다 허둥대네.…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럽네.” 1740년 사천 이병연(1671~1751)이 양천현감으로 떠나는 겸재 정선(1676~1759)에게 보낸 이별시다. 지금으로 치면 멀지도 않은 양천구청장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이별이 원망스럽네. 어쩌네’ 하는 것이 좀 ‘오버’인 듯싶다. 하지만 평생지기 ‘베프’였던 천재시인과 화가의 브로맨스를 안다면 이런 호들갑쯤은 이해할 수도 있다.

 

 

5살 차이인 두 사람은 서촌(서울 청운동 옥인동 일대)에서 나고 자랐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 정선보다 덜 알려졌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로는 ‘그림은 정겸재, 시는 이사천’ ‘좌사천, 우겸재’였다. 사천은 평생 1만3000~3만수의 시를 지은 다작시인이었다. 시를 지을 때마다 수염을 쥐어뜯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시를 짓느라 수십일 동안 문을 닫고 끙끙거리던 사천의 얼굴엔 수염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밖을 나온 사천이 내놓은 상자에는 시가 가득했다. 그래서 ‘사천의 머리털 한 가닥, 수염 한 올도 모두 시’라는 말이 나왔다. 코흘리개 어린아이와 무지렁이 천민들에게도 알려진 대중스타였다. 사람들은 사천과 겸재 두 사람을 두고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극찬했다. 박사해(1711~1778)는 사천의 ‘시그림’이요, 겸재의 ‘그림시’라 표현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헤어진다면 사천의 한탄처럼 ‘날개 잃은 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천과 겸재는 몸은 떨어져 있지만 작품으로 함께하자고 약속한다. 사천의 시와 겸재의 그림을 주고받은 ‘콜라보’ 작품, 즉 시화첩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사천과 겸재의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이다. 사천은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바꿔보면 누가 남고 모자라는지 어찌 값어치를 매기겠느냐(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고 자랑스러워했다. 

 

둘의 콜라보 작품이 바로 ‘경교명승첩’이다. 겸재가 서울과 서울 근교 한강변을 그려 보내면 사천이 시를 붙였다. 두 노인(사천과 겸재)이 소나무 아래서 완성한 작품을 보는 그림(‘시화환상간’)에는 ‘천금물전(千金勿傳)’, 즉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넘기지 말자’는 겸재의 다짐 도장까지 찍혀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브로맨스라 할 수 있다. 최근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예고한 ‘경교명승첩’에는 270년 전 고차원적인 우정을 나눈 두 천재작가의 사연이 녹아 있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