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아키히토, 고려신사, 내선일체

“일본 왕실에 한국계 피가 흐른다”고 고백했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최근 고구려 왕족을 모신 사이타마현(埼玉)의 고려(고마)신사를 찾았다. 과거사 반성에 인색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는 대비된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신사가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의 성지(聖地)’로 떠받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고려신사 기사 앞에는 늘 ‘내선일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곳은 고구려 멸망 후 일본 조정이 마련해주었다는 고구려 유민촌을 다스린 고려약광(高麗若光)을 모신 신사(사진)다. 19세기 말까지는 평범한 신사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갑자기 유명한 답사코스로 각광받는다.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탈을 바꿔 쓴 일제가 이 신사를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전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총독부는 ‘내지시찰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각계인사들을 일본 본토에 파견했고, 이후 고려신사는 단골 답사코스가 됐다. 고구려 후손이 1200년간이나 일본의 보살핌 속에 뿌리박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총독부는 활동사진반(영상반)이 찍어온 영화필름을 조선 각지에 방영했다. 심지어 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고마다 히데오(兒玉秀雄) 백작 등 본토의 일본인들이 고려신사 후원회(봉찬회)까지 결성했다. 후원회 이사인 다케이 후미오(武井文夫)의 언급이 소름끼친다. “고구려 망명객을 잘 대접해서 동화시킨 이 역사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야말로 내선융화”라면서 “고려신사는 내선일체의 살아 있는 모형이자 증거”라 했다.

 

1940년 4월5일에는 조선신궁과 고려신사 사이에 나무교환식이 열렸다. 조선신궁은 고려신사에 오엽송과 개나리를, 고려신사는 조선신궁에 벚꽃나무를 각각 선물했다. 매일신보의 제목은 ‘내선일체의 신목(神木) 교환’이었다. 양측은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오늘도 내선인(일본과 조선인)이 손잡고 가야 한다”(조선신궁) “황국의 은혜에 고려왕의 영혼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고려신사 봉찬회)이라는 등의 덕담을 주고받았다. 다케이는 “조선신궁이 보낸 오엽송과 개나리를 내선번영의 기초로 여겨 잘 키울 것”이라 다짐한다. 지긋지긋한 ‘내선’ 타령이다. 고려신사는 이처럼 내선일체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신사 방문을 굳이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냥 넘기기 어려운 어두운 역사의 편린이 고려신사에 숨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필요가 있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