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 1948년 6월7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30명은 무기명 투표 끝에 압도적인 표차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의결했다. 그러나 ‘대한’이 국호로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1897년 고종(사진)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大韓)’이라 했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책봉을 받은 기자조선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명나라 황제가 낙점해준 국호”라는 것이다. 고종은 “삼한(三韓)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이상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고종의 ‘대한’은 한일병합으로 13년 만에 단명했다. 9년 뒤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내외 독립투사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만든다. 국호가 화두로 떠올랐다.

 

우선 신해혁명(1911년)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영향을 받아 ‘민국’으로 정했다. 그러나 ‘대한’은 논쟁을 낳았다. 망한 나라인 ‘대한’을 다시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다. 다수결 끝에 ‘대한민국’으로 낙착됐지만 ‘고려’와 ‘조선’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았다. 논쟁은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때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제헌국회 의장인 이승만은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니 당연히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성수가 이끄는 한민당 등은 ‘고려공화국’을 선호했다. 중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의 국호는 언급할 가치가 없고, 한(韓)은 한반도 남부의 부락국가, 그것도 삼한 분립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대한은 일제에 의해 망한 치욕의 국호라 폄훼했다. 일부 사학자들은 ‘대한’의 대(大)는 대영이나 대일본처럼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비판했다.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국시로 삼아야 할 이때 무슨 시대착오적인 국호냐는 것이었다. 반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야말로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꿋꿋하게 이겨낸 완전한 통일국가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국호(코리아)가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을 초지일관 앞세웠다. 결국 ‘국호 문제는 추후 적절한 시기에 재논의하자’는 이승만의 설득이 통해 ‘대한민국’으로 최종 결정됐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독립투사가 대한(大韓)의 기치 아래 모인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궁금해진다. 훗날 통일이 되면 새로운 나라의 국호는 어떻게 정할까. 이승만이 말한 ‘적절한 시기’는 바로 그때가 아닐까.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