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곽재우와 유관순의 서훈등급

“(내시·마부 같은) 천것들과 같이 공신반열에 오르니 어찌 후세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선조실록>)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의 공신책록 사실을 기록한 사관이 장탄식한다. 곽재우·정인홍·김면·김천일·고경명·조헌 같은 의병장들은 빠지고 깜냥도 안되는 자들이 대거 공신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왜적을 무찌른 선무공신은 이순신·원균·권율·김시민 등 18명에 불과하고,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한 내시(24명)·마부(6명) 등을 포함한 86명이 호성공신(사진)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명공대신보다 끝까지 임금을 수행한 최측근들에게 상급을 내린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의리지키기’ 차원이 아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승전’의 요인을 ‘조선의 강산을 다시 만들어준 명황조의 은혜(再造之恩)’라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까지 따라와 중국에 지원군 파병을 호소한 덕분에 왜적을 토벌했다”고도 밝혔다. 선조는 결국 임진왜란의 특등공신은 선조 자신과 선조를 따라준 측근들이라고 여겼다. 못난 임금의 못난 논공행상이다. 그렇다면 장수들의 공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선조는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조선의 장사들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이라고 폄훼했다. 애초 26명의 공신 후보에 올랐던 의병장 곽재우 장군도 최종 18명의 선무공신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선조는 오히려 의병장들이 민심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의심했다. 의병장 김덕령이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장살(杖殺)됐고, 곽재우 장군의 집은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 뒤늦게 곽재우 등 의병장들이 ‘공신대우’ 격인 선무원종공신으로 등재됐다. 그러나 그 수가 자그마치 9060명이었으니 의병장들의 공을 9060분의 1로 평가한 것이다. 초야에 묻힌 곽 장군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왜적을 토벌하느라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국가의 변란 때 마땅히 다시 나와 선봉에 서겠습니다.”(<광해군일기>)

 

근자에 유관순 열사의 낮은 독립운동유공 서훈(3등급)을 올리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1962년 서훈 당시 어떤 기준이었는지 몰라도 독립운동의 상징 인물에게 3등급이라니 어인 일인가. 6형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회영 선생도 역시 3등급이다. 재조정이 필요하다. 사실 이런 분들에게 감히 등급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