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안중근의 전쟁과 평화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겨눈 브라우닝 M1900 권총에서 났던 총소리다. 이 총은 칠연발형이었으나 실제로 발사된 것은 여섯 발이었다. 세 발이 이토에 명중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수요(數謠)는 “육혈포로 칠 발을 쏜” 안중근을 기리며 그 총소리를 일곱 발로 듣는다.


제국주의는 무도하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적어도 조선에 관한 한 단순한 식민지배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지적대로 그것은 독립국에 대한 강탈이고 침략이다. 더 나쁘다. 안중근은 이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활동을 전쟁으로 규정한다.


안중근에 대한 일본의 재판은 법적으로 정당한가? 안중근의 거사가 이루어진 곳은 하얼빈역이다. 이곳은 청국의 영토이지만 러시아가 조차하여 동청철도의 부속지로 관리하였기에 러시아의 관할 아래 있었다. 러시아는 안중근에 대한 재판권을 서둘러 일본에 양여하였고, 일본 외무대신의 명령에 의하여 사건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넘겨졌다. 일본인 담당판사 마나베 주조의 판결문은 일본 법원의 재판권 행사에 근거가 된 한청통상조약과 을사보호조약의 적용에 관하여 그 나름대로 논리를 편다. 그 논리는 억지다. 이토의 전기소설을 쓴 미요시 도오루마저 이 점을 인정한다. 문제는 안중근이 일제에 의해 치안범으로 처단된 일이다. 그에게 적용된 법은 일본의 국내법이다. 안중근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행한 일로 이 재판정에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만국공법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법학자 헨리 휘튼이 저술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는 1864년 청국에서 한역되어 ‘만국공법’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이 일역되고 다시 1880년 조선에 유입되어 식자층에 퍼졌다.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전쟁에 관한 것으로, 그중엔 교전 시 적국 병사가 아군에 억류되었을 때 전쟁포로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실제로 안중근은 1908년 함경도에 진격하여 일본군과 벌인 전투에서 일본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가 석방한 일이 있었다.


법학자 명순구는 안중근을 전쟁포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이렇다. 안중근은 당시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된 의병부대인 ‘대한의군’에서 참모중장의 직책을 받았다. 의병은 민병대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국제법상 교전단체다. 이토는 저격을 받을 당시 일본의 추밀원 의장의 직위에서 군사 통괄권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대한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적국의 정부기관으로서 교전자격을 가진다. 이렇게 되면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비정규군이기는 해도 군인이 적국의 군통수권자에 대하여 행한 무력행사다. 즉 군사행동인 것이다. 재판정에서 한 안중근의 항변은 궤변이 아니다.


이토 저격 사건의 담당판사 마나베 주조의 판결문에는 이 항변에 대해 아무런 판단이 없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이미 일본의 신민이며, 일본 법의 적용을 받는다. 너희는 일본과 전쟁을 할 자격이 없다.” 마나베의 재판은 근대 사법제도의 산물이다. 그 판결문의 논리와 문체는 21세기 한국의 법률가에게도 낯설지 않다. 나는 이 점에 몸서리친다. 대한제국이 당장 강도 일본과 싸워야 할 때, 그들은 이미 서구의 근대성에 합류한 것이다. 다만 일본의 근대성은 사이비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의 논문에 일본의 근대화가 ‘독특한’ 것이었다고 썼지만, 아니다. 그냥 가짜다. 근대성으로 치자면 외려 안중근의 인식이야말로 그 정수에 닿아 있다. 마나베는 틀렸고, 안중근은 옳았다.


이토가 열차 안으로 옮겨져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바카”였다. 바보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자기를 쏜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뱉었다고 한다. 그는 안중근의 식견을 비웃었을 게다. ‘동양평화를 위한 내 뜻을 모르다니’ 또는 ‘그래 봤자 어차피 조선은 먹힌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 무도한 침략과 전쟁의 정치학을 배워 아는 체하는 자들은 안중근을 무모한 테러범이라며 비웃을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이토가 태어날 것이고 또 이토류의 정치철학에 동조하여 날뛸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얼마나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공헌하였다는 것인가. 너희의 이욕 추구는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 평화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 이토의 기만적 동양평화론에 안중근은 옥중 집필한 ‘동양평화론’으로 답했다. 이토는 틀렸고, 안중근은 옳았다.


지난 3월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재개관되었다. 안중근은 처형되기 직전 동생들에게 자신의 유해를 조국의 주권이 회복되었을 때 조국으로 이장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매장지를 알리지 않았다. 단서도 희미하다. 일본에서 개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토의 장례는 근대 일본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일본 내에 기념공원과 신사가 세워지고, 장충단 동쪽에 그를 추념하는 절인 박문사가 세워지기까지 했다. 왼손 약지 첫 마디를 끊어 국권 회복을 맹세한 삼십일 세의 청년, 우리의 영웅은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작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유공자 초청 오찬에서 그의 유해 발굴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다. 안타깝다. 빠른 봉환을 고대한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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