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불후의 기록’ 탁본

1816년 7월 추사 김정희는 북한산 비봉에 올라 비석을 발견했다.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비석이었다. 이끼 낀 비석을 만지니 글자가 보였다. 몇 번 탁본을 하니 진흥왕의 ‘眞(진)’ 자가 드러났다. 이듬해 6월 다시 비봉을 찾은 추사는 모두 68자를 판독한 뒤 진흥왕순수비로 단정했다. 북한산비의 발견은 조선 금석학의 시작을 예고했다. 자신감을 얻은 김정희는 본격 비석 조사에 나섰다. 경주를 돌며 진흥왕릉, 분황사 화쟁국사비, 무장사비, 문무왕릉비를 찾아 확인하고 고증했다. 그렇게 ‘깨진 빗돌을 찾아다니며(搜斷碣)’ 추사는 금석학자로 태어났다. 


금석문에 대한 관심은 추사보다 이계 홍양호(1724~1802)가 빨랐다. 조선 명문가 자제였던 이계의 취미는 서화와 탁본 수집이었다. 그는 수집뿐 아니라 직접 탁본을 하고 표구도 하며 감상평도 썼다. 그가 수집한 탁본에는 망실된 비석도 적지 않았다. 이계의 주된 관심은 금석학 연구보다 탁본 수집이었다. 그의 금석첩에 들어 있던 ‘인각사비 탁본’ 등은 뒷날 비석 복원의 중요한 자료가 됐다. 이계가 모은 탁본과 서화 목록은 손자 홍경모가 편찬한 <사의당지>에 전한다. 


금석문은 종(鐘)이나 비석에 새긴 글을 말한다. 썩지 않고 물이나 불에 훼손되지 않는 ‘불후(不朽)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욕망은 금석문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금석문은 역사·고고학의 사료이면서 미술사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금석학 전통은 김정희 이후 오경석, 오세창, 고유섭, 임창순, 황수영으로 이어져왔다. 지금은 거의 끊어진 상태다. 탁본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대박물관의 특별전 ‘불후의 기록’(10·2~12·7)은 흔치 않은 탁본전이다. 서울대박물관, 규장각, 국립박물관 소장 탁본 100여점을 박물관 1~2층에 펼쳤다. 금석학의 시원을 연 낙랑 점제현신사비(서기 85년), 높이 5.5m의 광개토왕비, 4대 진흥왕순수비, 태종무열왕비, 인각사비, 화엄사석경 등 ‘역대급’의 금석문 탁본이 망라됐다. 반구대 암각화,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대각국사비 봉황문양 등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탁본도 선보였다. 탁본으로 보는 우리 역사다. 그러나 썰렁한 전시장은 ‘절기(絶技)’가 된 탁본의 현주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