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여적]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직후 일본은 조선에 강화와 함께 무역재개를 요청했다. 새 집권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 도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 160여명을 송환했다. 1604년 8월, 조선은 사명대사를 대표로 하는 ‘탐적사(探敵使)’를 파견했다. 사명대사가 일본 국정을 탐색하고 조선 포로 3000여명과 함께 귀국했다. 국교재개에 대한 반대여론은 여전했다.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조선왕릉 도굴범 소환, 두 가지를 더 요구했다. 일본이 이를 수용하면서 조·일 국교회복은 급물살을 탔다.


1607년 1월12일, 여우길을 정사로 한 504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실상의 국교 재개였다. 그러나 사절단의 이름은 종래의 ‘통신사’가 아닌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일본의 요청에 의해 보내는 포로송환을 위한 사신단이라는 뜻이다. ‘신뢰로 교류하는 사절단’이라는 통신사 명칭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세 차례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된 뒤인 1636년부터였다. 이후 통신사는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 파견됐다.


조선 전기에도 통신사는 있었다. 1413년부터 1596년까지 8번 파견됐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선통신사 하면 후기의 통신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조선통신사 파견은 대부분 일본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덜고 조선의 선진문화를 전수한다는 우월의식을 과시했다. 반면 일본은 통신사를 조공사절인 양 선전하며 통치수단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서로의 이해는 달랐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이 통신사를 통해 ‘문명 간 대화’를 이어갔고 서로를 발전시켰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 24일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연됐다. 부산시와 시모노세키시가 16년째 치러온 문화 행사이지만, 올해는 유독 곡절이 많았다. 준비과정에서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보이콧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았다. 그러나 부산시는 행정 교류 없이 민간 문화행사만 치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베의 정치적 야욕이 양국의 오랜 문화 전통마저 위축시키고 있다. 일본은 정말 ‘신뢰로 교류하기’ 어려운 나라인가.


<조운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