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투혼의 필리버스터’ 은수미, ‘지못미 의원’이 되다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53)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노태우 정권 때인 1992년이다. 그해 5월 국가안전기획부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공안정국 조성에 혈안이 됐던 안기부는 “사노맹은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려 했던 남로당 이후 최대 지하조직”이라고 했다.

언론은 안기부 발표를 여과 없이 받아 썼고, 구속자 명단을 게재했다. ‘은수미(29·서울대 사회학과 3년 제적).’ 사노맹에서 정책국장을 맡았던 그의 이름 석자가 신문에 실렸다.

안기부가 발표한 수사결과와는 달리 사노맹은 군사정권 타도, 유럽식 사민주의 건설, 진보적 노동자 정당 설립 등을 목표로 1989년 11월 결성된 조직이다.

사노맹 활동을 하기 전 은 위원은 서울 구로공단 봉제공장에 1년6개월간 위장취업했다. ‘봉희’라는 가명을 쓰며 하루 12시간 일했다. 기계식 미싱 바늘이 손톱을 관통해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작업반장은 “멍청아! 옷감에 피가 묻잖아”라고 질책했다. 봉제공장의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여름철 선풍기 없는 공장에서 일할라치면 작업복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겨울에는 다리미로 곱은 손을 녹이며 일했다.

노동현장에서 나와 사노맹에서 활동하다 검거된 그는 20여일간 안기부 조사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폐렴과 폐결핵, 후두염, 협심증 등을 앓았고, 소장과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2차례나 받았다. 강릉교도소에서 6년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1997년 출소한 그는 이듬해 서울대에 복학했고, 2001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5년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3월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된 그는 노동현장과 이론을 아우르는 노동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국책연구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정부의 노동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던 그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해고 1순위’가 됐다. 월급도 30%나 깎였다. 청와대는 그가 2007년 8월부터 경향신문에 기고하던 칼럼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은 의원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은 ‘사람 자르는 효율성 신화’(사진) ‘야만의 시대’ ‘비정규직 아웃’ 등과 같은 제목이 일러주듯 이명박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국노동연구원을 나온 뒤 ‘재야 노동전문가’로 활동하던 그는 2012년 민주통합당 비례대표(3번)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4년간 노동운동을 하듯 의정활동을 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위원으로 쌍용차 해고자 문제 해결,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실태 고발, 비정규직 철폐 등에 관심을 쏟았다. 은 의원은 지난 2월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며 10시간18분에 걸친 ‘투혼의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필리버스터를 마무리 지으며 한 말은 “우리는 약해도 강합니다”였다.

4·13 총선에서 경기 성남중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그는 페이스북에 “기억하시죠? ‘포기하지 말고, 무릎 꺾여도 일어나자’고 했던 제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희망을 곁에 두세요”라고 썼다. 자신의 글처럼 그는 젊은 시절 폭압적인 정권에 의해 무릎 꺾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포기란 없었고, 희망을 곁에 두려 했다. 이제 4년 뒤를 기약해야 하는 은 의원에게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마음속으로 한 말이 있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