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아흔 살 송해, ‘딴따라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12.7%. 지난 1일 방영된 KBS <전국노래자랑> 시청률이다.(닐슨 코리아 집계) 아이돌 가수들이 출연하는 공중파 3사의 대표적 음악프로들이 1~2%대의 ‘애국가 시청률’에 머무는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차이다. 음악을 소비하는 환경이 인터넷과 모바일 중심으로 바뀐 걸 감안해도 대단한 인기다.

매주 일요일 오후 12시10분 <전국노래자랑>은 어김없이 ‘빰빠라’를 울린다. 촌스러운 무대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한바탕 난장을 벌인다. 그 중심에 아흔 살 송해가 있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 망가질 수 있다”며 나이도 권위도 다 벗어던지고 사람들과 어울린다.(경향신문 1996년 7월20일자·사진) 출연자는 물론이고 객석과 시청자들은 탈권위의 희열을 느낀다. 오민석 단국대 교수는 이를 송해가 만드는 ‘횡단의 쾌락’이라고 했다.



송해의 삶은 <전국노래자랑>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 스물두 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방황하던 그는 “전국을 돌며 바람이나 쐬자”는 심정으로 1988년 5월 <전국노래자랑> MC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나이가 61세였다. 1994년 7개월간의 중도 하차, 2012년 두 차례 녹화불참이 있긴 했지만 시청자들의 ‘성원’에 힘 입어 30년을 달려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온갖 외풍을 타는 KBS지만 송해만은 무풍지대다. 누구도 MC의 교체를 말하지 않는다. 인기나 시청자들의 지지도 면에서 그를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송해의 본명은 송복희다.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곡창지대 재령평야가 있는 곳이다. 재령에서 가까운 해주에는 해주음악전문학교가 있었다. 송해는 1949년 22살 때 이 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선전대’ 대원으로 북한 전역을 돌며 공연했다. 1년에 한 두 차례였지만 한번 나가면 두 달 이상 걸리는 공연이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12월 단신으로 월남해 국군에 입대했다. 임무는 통신병이었지만 끼는 어쩔 수가 없어서 ‘군예대’에 수시로 호출돼 무대에 섰다. 제대 후 연예의 길로 들어선 그는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 악극단 광대로 전국을 유랑하면서 끼와 기(技)를 갖춘 그는 1960년대 라디오에 출연하면서 물을 만났다.

197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되자 송해의 몸값은 더욱 뛰었다. 1977년 연예인 신고소득자 9위에 이름을 올렸다. 100만원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시절에 483만원을 신고했다니 돈 좀 만졌겠다. 1978년 광고 호감도에선 8위로 최불암, 송창식, 구봉서, 배삼룡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85년에도 고소득 13위를 기록할 만큼 인기가도를 달렸다. 당대 스타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거나 은퇴했지만 그는 ‘오빠’이자 ‘엉아’로 불리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90세 되던 날 후배들이 특별한 생일상을 차렸다. 오는 22일 무대에 올릴 ‘백세인생 송해와 함께 효 콘서트’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송해는 이 콘서트에서 “죽을힘을 다해” 마당놀이에 도전한다. 162㎝ 작은 거인의 ‘백세 드라마’가 막 시작되었다. ‘해형’ 파이팅!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