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소수의 대변자’ 하승수, 녹색정치 ‘씨앗’ 뿌리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48)은 다수보다는 소수, 가진 자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 왔다. 다수를 이기는 ‘소수의 힘’을 믿어온 그가 지켜온 삶의 원칙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과 낙관을 잃지 않으며, 비폭력과 평화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것”이란 녹색당 강령과 닮았다. 그는 대구에서 나서 부산에서 자랐다. 고교 시절 공부 말고는 다른 것에 곁눈질하지 않던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해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모순에 눈떴다. 그렇다고 이념에 매몰된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는 24살 때인 1992년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고, 3년 뒤에는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시절 잡지를 만드는 편집부에 들어가 취재차 들른 참여연대에서 당시 박원순 사무처장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인생행로는 제도권에서 시민단체로 바뀌게 된다. 박 사무처장의 도움 요청을 받은 그는 참여연대에서 월 80만원 안팎의 활동비를 받고 일했다. 납세자운동팀장을 맡아 정부의 조세정책 감시활동을 벌이던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1999년 7월7일자 7면)에서 “참여연대가 주장했던 각종 정책들이 정부 시책에 반영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민운동에 매진하면서 그의 행동반경과 보폭은 커졌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초대 소장을 맡았을 때 그는 공무원들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재정경제부·기획예산처 등 정부 부처는 물론 국정원·검찰·국세청 등 ‘힘센 기관’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행정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검찰의 민간인 사찰자료,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판공비·업무추진비 사용내역 등을 낱낱이 밝혀냈다.

2004년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그의 관심 영역은 생명·환경·탈핵으로 확장됐다. 그는 당시 정부가 전북 부안 앞바다의 위도에 설치하려던 핵폐기장을 주민투표로 백지화시켰다. 밤낮없이 13개 읍·면을 돌면서 핵폐기장의 위험성을 알리자 주민 92%가 반대하는 ‘부안의 기적’을 이끌어낸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하 위원장을 ‘탈핵 운동가’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해 11월 녹색당 창당을 주도한 그는 밀양·청도 송전탑 설치 반대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녹색당은 4·13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 5명, 비례대표 후보 5명을 냈다. 하 위원장은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녹색당은 이번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3%를 얻어 비례의석으로 원내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녹색당은 지역구 출마자들이 모두 낙선하고 정당 득표율도 0.76%(18만2301표)에 그쳐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19대 총선 때의 0.48%(10만3842표)에 견주면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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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위원장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했던 ‘천막 선거사무소’엔 ‘대안의 숲, 전환의 씨앗’이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녹색당은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의 무관심과 언론의 외면 속에서도 녹색정치를 위한 ‘전환의 씨앗’을 뿌렸다. 그 씨앗은 척박한 한국정치의 풍토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울창한 ‘대안의 숲’을 이룰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