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1등 새누리당’ 세일즈 나선 ‘국수’ 조훈현

1989년 9월7일 경향신문 4면엔 두 명의 세계 정상이 개선하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한 명은 세계레슬링선수권에서 23년 만에 금메달을 딴 김종신이고, 다른 한 명은 제1회 잉창치(應昌期)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조훈현 9단이었다. 조훈현은 김포공항에서 관철동 한국기원까지 바둑계 최초로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제왕’의 기쁨을 만끽했다.

잉창치배 우승은 조훈현에게 특별했다. 만 10세에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문하에 들어가 꿈을 키우던 조훈현은 1972년 병역 문제로 귀국한 뒤 1974년 최고위 우승을 시작으로 거침없이 반상을 점령했다. 숱한 신예들이 ‘조훈현 타도’를 외쳤으나 누구도 그를 넘지는 못했다. ‘영원한 2인자’ 서봉수의 비수에 간간이 피를 흘리긴 했지만 그의 독주는 멈추지 않았다. 1980년, 1983년, 1986년 전관왕의 위업을 쌓았다.

그때마다 공교롭게 조치훈이 그의 금자탑을 가렸다. 두 살 어린 조치훈이 당시 메이저무대였던 일본에서 1인자(명인과 기성)에 거푸 오르자 한국 언론은 조치훈만 바라봤다.





‘큰 물’을 기다리던 조훈현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왔다. 1988년 후지쯔배와 잉창치배, 두 개의 세계대회가 잇달아 생겼다. 조훈현은 잉창치배에 승부를 걸었다. 상금이 40만달러로 두 배나 많은 데다 한국 바둑을 낮춰보고 출전 티켓을 한 장만 준 것에 오기가 생겼다. 조훈현은 8강전에서 일본의 1인자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를, 준결승에서 린하이펑(林海峰)의 ‘이중 허리’를 꺾었다. 결승 상대는 ‘괴물’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를 제압한 녜웨이핑(衛平). 결과는 대역전극이었다. 조훈현 바둑 인생에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제왕을 기다리고 있는 적수는 제자였다. 1990년 2월2일, 37세 젊은 스승은 15세 제자 이창호에게 반집 차로 최고위를 내줬다. 조훈현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나는 최고수였다. 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충격이 컸다. 반상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사이인데 아침마다 집을 같이 나서는 것도 고역이었다.” 1995년 2월 그는 이창호에게 마지막 남은 대왕 타이틀마저 내줬다.

조훈현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지만 그가 쓴 반상기록은 눈부시다. 2780전 1944승 9무 827패, 세계 최연소 입단(9세), 전관왕 3회(1980년 9관, 1982년 10관, 1986년 11관),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잉창치, 후지쯔, 동양증권배), 세계대회 우승 11회, 국내 첫 1000승, 국내 첫 9단(29세인 1982년), 타이틀전 최다연패(패왕전 16연패), 통산 타이틀 160회…. 가히 파천황의 기록이다.

그런 조훈현이 새로운 길에 섰다. “이제 바둑계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서” 자기 생일인 3월10일 새누리당에 몸을 의탁했다. 3년여 낮잠을 자고 있는 바둑진흥법 등 숙원이 많은 바둑계도 반기는 눈치다. 관건은 ‘금배지’ 하나가 바둑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다.

조훈현은 요즘 “1등 새누리당, 1등 후보를 찍어달라”며 총선 유세장을 열심히 돌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수(國手)’의 행마치고는 많이 낯설고 열없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 jsal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