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경제통’ 이한구, ‘공천 피바람’을 부르다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71)이 정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가장 오랫동안 몸담았던 곳은 대우경제연구소였다. 경북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1969년 행정고시(7회)에 합격한 그는 재무부에서 근무하다 1984년 대우그룹으로 옮겼다. 당시 회장실 상무로 일하던 그는 김우중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룹사 브리핑, 국내외 공장 시찰 등 김 회장의 동선(動線)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샐러리맨 성공신화를 써나가던 김 회장의 ‘세계경영’ 전략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3년간 ‘그림자 보좌’를 한 그에게 김 회장은 “제조업 계열사 책임자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우경제연구소로 보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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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경제연구소는 1984년 설립된 국내 첫 민간 경제연구소였다. 과도한 차입경영과 분식회계로 대우그룹이 해체된 1999년 문을 닫을 때까지 민간 ‘싱크탱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87년부터 9년간 대우경제연구소장을 지낸 그는 ‘완벽주의자’로 통했다. 연구원들이 보고서를 작성하면 몇 번씩 검토하며 빨간 펜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언론사 기자들에겐 ‘훈수 전문가’로 불렸다. 기자들이 경제현안이나 정부 정책과 관련된 기사를 쓸 때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제진단은 독하고 매서웠다.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비딱한 시선을 못마땅해했던 경제관료들은 대우그룹이 몰락하자 “제 집 단속도 못하면서 나라경제에 대한 훈수만 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대권후보들의 ‘경제교사’ 명단에 올랐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경제분야 ‘족집게 과외교사’ 중 한 명이었던 그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다. 경향신문 1998년 2월21일자 9면에는 “배순훈 대우그룹 프랑스 본부장, 장영수 베트남 본부장과 함께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의 입각 여부가 주목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향신문은 기사에서 “이 소장은 금융실무에 밝아 산업자원부 장관과 금융감독원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세 사람 중 배순훈 본부장만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한 이 위원장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캠프에 몸담으면서 ‘진박’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올해 2월 불출마를 선언하고 지역구를 떠나면서 ‘잊혀진 정치인’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이 돼 공천 칼자루를 쥐면서 피바람을 몰고 왔다. ‘유승민계’ ‘친이계’ 등 비박계 의원들은 그가 휘두른 칼날에 베어 줄줄이 낙천했다. “청와대의 하청을 받고 무자비한 공천학살의 전면에 섰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그는 ‘마이웨이’를 고집했다. ‘공천학살’의 역풍도 거셌다. 총선 후보자 공천을 위한 여론조사 경선에서 ‘진박’ 예비후보들이 대거 탈락한 것이다. 박 대통령 눈 밖에 난 유승민 의원의 자진사퇴를 압박하기도 한 이 위원장이 얻은 것은 ‘막장 공천’ ‘최악의 공천’을 주도한 ‘공천학살자’라는 오명뿐이지 않을까. 4·13 총선을 20여일 앞둔 현재로선 그렇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