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돈 걱정 모르던 하일성 ‘인생 몰라요’

1983년 8월 말 한·일 고교야구대회가 일본에서 열렸다. 라디오 생중계를 하던 해설자는 ‘적지에서 잘 싸우고 있는 선수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초반부터 신이 났다. 10분쯤 지났을까. “아니, 미쳤어? 지금 뭐하는 거야. 한국과 일본이 뒤바뀌었잖아.” 국제전화가 빗발쳤다. 중계석이 경기장과 너무 떨어진 탓이 컸지만 한·일 선수를 혼동하다니 ‘대형사고’였다. 해설자는 ‘하구라’ 하일성이었다. 천만다행으로 한국 팀이 이겨준 덕에 시말서 한 장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그는 훗날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암담했다”고 그날을 회고했다. (경향신문 1997년 5월6일자)



고교 체육교사였던 하일성은 1979년 동양방송(TBC) 야구해설위원으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KBS에 둥지를 틀었다. 야구팬들은 하일성 특유의 입담을 좋아했다. 그의 해설은 데이터보다 ‘촉’에 의존하는 스타일이었다. 1983년 한국시리즈 전망이 단적인 예다. 해태 타이거스와 MBC 청룡이 맞붙었는데 말 그대로 용호상박의 형세. 야구전문가 대부분이 청룡의 우승을 점칠 때 하일성은 해태를 꼽았다. 결과는 해태 4승1무, 하일성의 완승이었다. “야구 몰라요” “역으로 가나요?” “다음 공은 직구 아니면 변화구예요” “것 보세요. 제 말이 맞죠” “~라고 봤었을 때” 그는 숱한 유행어를 만들면서 프로야구 간판 해설자로 자리를 잡았다.

하일성은 야구해설뿐만 아니라 각종 예능·오락프로까지 누비며 몸값을 올렸다. 1990년 12월6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경쟁자들이 2000만원의 연봉을 받을 때 하일성은 2400만원을 받았다. 1996년엔 프로야구 해설가로는 최고수준인 2억1000만원에 KBS와 3년 계약을 맺었다. 당시 고액연봉 선수 랭킹으로 따지면 최소 25위권 수준이었다. 경쟁사인 SBS가 연봉 1억원을 제시했지만 하일성은 돈보다 친정집 KBS와의 의리를 택했다.

하일성은 위기에서도 잘 버텼다. 2002년 심근경색으로 3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하게 컴백했다. 2004년 스포츠부문 최초로 방송대상의 영예도 안았다. 2006년 5월엔 24년간 잡았던 마이크를 놓고 KBO사무총장에 올랐다. 대표팀 단장으로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에 한몫했다. 그는 한때 ‘가장 모시고 싶은 강사’로 1년에 200회 이상의 강연에 나설 만큼 인기도 누렸다. 그러나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2010년에 스포츠케이블 방송 해설을 맡았지만 2014년 하차해야 했다.

팬들의 시선에서 멀어져가던 그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최근에 또 사기혐의로 입건됐다. 하일성은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2013년 펴낸 책에다 이렇게 적었다. “나는 자라면서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 유산은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만큼 많았다. 새엄마가 유산 포기각서를 써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깨끗이 손을 털었다. 해설가로서 자리도 잡았고, 방송 출연과 강연으로 생기는 수입도 쏠쏠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나한테만 남긴 재산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랬던 그가 돈 2000만~3000만원 때문에 사기혐의라니. 진위는 수사기관에서 밝혀지겠지만 그의 유행어 ‘야구 몰라요’를 빗대자면 진짜 ‘인생 몰라요’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